갑자기 세상이 어수선해졌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논란으로 국회가 시끄럽고 야당은 거리로 나선 마당에 이번엔 지난 대선 때부터 현 정부 인사들에게 계속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진보당 소속의 이석기 현역 의원이 국정원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수사대상에 오르고 주변인들이 줄줄이 검찰에 의해 구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민주당, 진보당 가릴 것 없이 야당들을 향한 백색테러가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다. 각종 보수단체들이 백색테러에 나서며 시민단체들의 거리시위까지 위협 당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민주당은 전선 설정에 허둥대는 모양새다. 국정원 대선 개입은 국정문란행위라고 토를 달지만 진보당에 튄 불똥에서는 멀찍이 도망치는 게 마치 덩치 큰 동네 형의 으름장에 겁먹은 어린 아이들 같다.
이런 사정 탓일까, 이쪽저쪽 모두를 향해 ‘설마’ 하는 마음이 드는 상황이다. 현재 서슬 퍼렇게 수사 중이라는 사건, 더욱이 국정원은 확증을 갖고 있다고 서두르는 마당에 섣불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두렵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없이 자꾸 인혁당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때도 국가 공권력은 뚜렷한 물증을 확보했다고 장담했고 많은 이들이 서둘러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잘못된 수사, 잘못된 재판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의 애달픈 목숨은 되돌아올 수 없고 남은 가족들이 겪은 수십 년의 간난신고도 온전히 보상받을 길이 없는데. 그래서 더욱 ‘설마’ 하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진보당의 논리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만한 세력 하나쯤 품을 수도 없는 대한민국의 초라한 포용력에도 한숨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적기가’인가 하는 노래도 말썽이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쓰였고 우리 선조들도 즐겨 썼으며 근래의 여야 정치인들도 입에 달고 살던 이민위천(以民爲天), 즉 백성이 하늘이라는 글귀를 담은 액자가 그 말을 김일성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북쪽과의 관련성을 의심받는다니 그쯤에 이르면 헛웃음만 웃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두 개그맨들도 아닌데 어떻게 전 사회가 블랙코미디 속으로 빠져드는 것인지.
이 상황에서 한 언론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80년 당시 여기저기 언론사들마다 제작거부 사태가 줄을 잇던 시절, 남영동에 끌려갔던 선배는 사주한 자를 불라며 고문하는 황당한 상황에서 하도 고문을 당하다보니 꼭 죽을 것 같아 없는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더란다. 순간 번쩍 든 생각에 유고슬라비아 부통령을 지낸 밀로반 질라스의 ‘새로운 계급’을 읽었다고 답했단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대통령과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을 새로운 계급이라고 비판해 서방세계에서, 특히 반공주의의 극성을 치닫던 박정희 시절의 한국에서는 아예 정부 권장도서로 읽혔던 책이다.
그러나 고문기술자는 행인지 불행인지 그 책도, 유고의 반체제 인사로 몰렸던 밀로반 질라스도 몰랐기에 그 선배는 더 이상의 고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재판은 웃음거리로 끝났고.
어떻든 남북이 대치중인 상황, 북핵문제며 이러저러 터져 나온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경계심이 바늘 끝처럼 돋아나는 현실이 십분 이해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가 이만큼 컸다고 자부하려면 이건 아니지 싶다. 어느 새로운 사조도 시작은 요즘 한국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단(異端)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그런 무수한 이단 중에 대중들이 수용 가능한 것은 살아남고 대중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라져간다. 그게 역사다.
지구온난화 문제며 각종 공해문제에 지구인 누구나가 걱정하고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금이야 환경운동을 누가 반체제로 보지 않지만 적어도 한국 땅에서 80년대에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반체제로 낙인찍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도적 사회운동에서 나아가 국가조직 내에도 환경부가 있고 국제사회가 화석연료문제 등 환경문제에 공조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족한대로 행동에 나서는 단계가 아닌가.
박근혜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도 ‘창조성’은 긴요하다. 그 창조성은 막힌 사회, 경직된 사고에서는 자랄 수 없다. 창조성을 키우려면 엉뚱한 반동도 좀 더 폭넓게 수용하는 사회적 역량이 필요하다. 한국사회, 그렇게 허약하지 않잖은가.
저작권자 © 서울파이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