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 하는 정부
'네 탓' 하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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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작금의 금융정보 대량 유출 사태를 앞에 두고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진다. 지금 중요한 것은 사태를 수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융소비자도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해줬지 않느냐”고도 했다.

헛웃음이 나온다.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고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방법은 있다는 얘기인가. 금융기관의 보안이 허술해 발생한 정보 대량 유출사태를 두고 금융소비자들의 탓을 하는 게 금융정책을 포함한 정부 경제정책 전반의 수장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다.

그런가 하면 전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오리농장에서 발생해 확대돼 가는 조류인플루엔자(AI)의 발병원인을 정부는 대뜸 ‘야생철새 탓’으로 돌린다. 발병 농장 근방에서 가창오리 10만 마리 정도가 서식했고 그 중 100마리 정도가 죽었는데 AI로 판정 났으니 가창오리가 전염시켰다는 논리다.

그 가창오리가 날아온 이동경로를 따라 러시아와 몽골에서도 AI가 발생했다면 이 논리가 맞다고 맞장구 쳐줄 수 있겠다. 그러나 그쪽 지역은 모두 멀쩡한데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2~3개월 멀쩡하던 가창오리들이 하필 AI 발생 농장 근처에서 떼죽음을 당했으니 누가 원인제공을 한 것인지 의심해보는 것이 합리적일 터다.

오히려 밀식 사육되는 오리의 생장환경 자체가 저병원성 AI를 고병원성으로 변이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반론도 적잖은 것을 보면 정부의 남 탓하기 습성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한동안 한국가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아젠다였지만 그걸 기화로 날름 “그래 네 탓이다”로 응수하는 세력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성숙도에 비해 너무 빨리 나왔나 싶을 정도로.

어린 아이들은 자기 잘못으로 넘어지거나 다치고도 곧잘 남의 탓을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그러려니 한다. 오히려 귀엽게 보고 웃어넘기거나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그러는 것을 웃어넘길 수는 없다. 더욱이 국가를 대표해서 일하는 정부와 지도자들의 그런 태도는 사회적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내 탓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자리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권한도 없어 책임질 건더기도 없는 장삼이사가 국가적 사태에 대해 함부로 내 탓이라고 나댈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정부의 어쭙잖은 행동에는 그런 정부를 투표로 뽑아준 국민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국민들이 사사건건 정부의 권한 행사를 다 쫓아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어 각종 감시기구까지 만들어 둔 마당에 얼마나 더 크게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일본의 아베 정권에 화를 내기보다 어이없어 하는 이유는 그들의 역사적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는 미성숙한 태도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을 보면 마치 덩치만 커진 채 남에 대한 배려와 예절은 익히지 못한 요즘 한국 중학생들을 보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생보다도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중학생들이 가장 무섭다고들 말하는 세상인데 우향우 해버린 일본을 보면 꼭 그런 중학생들을 보는 것만 같다. 그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철없는 망나니 아이처럼 굴 것인지 이웃으로서 한숨이 나올 지경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정부는 이일 저일 모조리 남 탓만 한다. 국민 탓, 철새 탓 등등.

그처럼 남 탓을 하는 이유는 정치적인 배경 등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 진실로 그 문제에 천착하는 전문가들과의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너무 잘 난 관료들이 어지간한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행정고시 제도가 도입된 이후 공무원 사회는 오로지 책만 보며 시험에 목매달던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그들이 사무관으로 정부기관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정책을 주무르기 시작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충만한 자신감으로 하부 기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만 터지면 얼른 책임 떠넘길 대상부터 찾는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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