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열풍과 강남 좌파의 무게
국가주의 열풍과 강남 좌파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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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뒤늦은 신년회를 겸해서 오래전 함께 일했던 옛 동료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한 친구가 자신은 강남 좌파라고 선언했다. 너는 강남 좌파가 아니라는 반박도 있었지만 대개의 술자리가 그렇듯 별달리 결론이 날 일도 없이 그 발언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스스로를 강남 좌파라고 자리매김하며 적이 안도감을 느끼는 듯 보이던 그 친구의 모습은 자리가 파한 이후로도 기억에 남는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그 친구에게서는 그동안 은연중에 그를 짓누르고 있던 사회적 부채감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그의 일상은 실상 좌파라는 개념을 붙여주기에 어색함이 있다. 정치적 입장을 뚜렷이 드러내지도 않고 또 사회적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자신을 강남 좌파라고 선언하는 데는 아마도 강준만 교수의 책이 한몫을 한 성 싶다. 최소한 나는 사회적 진보를 꿈꾸고 보수적 투표를 하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을 그 책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명 강남 좌파들에게서 한국사회의 진보에 대한 희망을 얼마나 기대해도 좋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종종 언론에서 ‘강남의 반란’이라 불리는 선거혁명이 벌어지곤 한 경험을 보면 사회정치적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 현재의 한국사회가 그나마 희망의 꼬투리라도 잡고 싶어할만 한 집단이기는 할 성 싶다.

그들은 적어도 전체주의적 열풍이 사회를 휩쓸 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의 엘리트적 이성이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또 요즘처럼 국가주의의 행진곡이 사회 전반에 울려 퍼지는 시기에도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대표적 국가권력기관의 총에 아버지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그의 집권 이후 국가권력기관에 대한 의존성은 나날이 커져가는 모양새다. 아버지 박정희의 소위 말하는 통치철학, 일제 식민지시절에 교육을 받은 세대들의 다수가 그렇듯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런 철학의 영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인지 요즘 기업들이 내놓는 광고 문구들은 그런 통치철학에 맞춰가는 경향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기업 광고는 ‘국가’와 ‘창조경제’를 빼놓고 제작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기업일수록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게다가 요즘은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이다. 국가간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변한 올림픽이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스포츠 성적이 마치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이기라도 하는 양 상업광고를 휩쓰는 국가주의 열풍은 섬뜩하다.

어린 선수들에게 너는 더 이상 너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광고 카피에는 지독한 국가주의의 악령이 꿈틀대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뻔뻔함과 몰염치까지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안현수 선수가 러시아로 귀화한 지는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달을 따고 아까운 마음에서였겠지만 어떻든 대통령이 한마디 질책을 하자 마치 엊그제 벌어진 일인 양 언론매체마다 떠들썩하게 그 문제를 들고 나선다.

대선공약 이슈를 선점했던 복지는 주춤주춤 후퇴하고 노동운동에는 갖가지 족쇄들이 덧붙여져 가지만 언론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내는 목소리는 너무 작다. 사회가 겁을 먹은 모습이다. 우 편향 사회 대한민국은 또다시 우향우를 외치고 있고 대통령의 속마음, 속칭 박심을 앞장서서 반영하고 있는 대중매체들이 제시하는 견해 이외의 의견은 소위 ‘좌빨(좌익 빨갱이)’이라는 비난의 융단폭격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다양성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과연 ‘창조’가 가능한 것인지 의아하다.

이런 외길 사회에서 변화의 역할을 담당할 이들로서 강남 좌파들이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전형적인 중산층의 삶을 사는 이들의 의견은 새로운 다양성 배양의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매카시 광풍을 겪으며 더 우경화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이 지닌 정도의 다양성을 지켜낸 것은 사회적 분위기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은 이성적인 중산층 지식인 그룹이 있어서 가능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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