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찾는 지도자
우리가 찾는 지도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영화 '명량'의 인기가 기존의 각종 기록들을 무너뜨리며 기세 좋게 치솟고 있다.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대체 무엇때문에 그런가 싶어 덩달아 구경가는 이들도 생겨날 정도로.

그런데 우리는 왜 '명량'에 열광할까. 영화 자체의 해전 씬도 볼만 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위대한 영웅, 그 이전에 인간적 고뇌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전투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 그 인물 자체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순신은 우리 문화 콘텐츠로서 추종을 불허할 캐릭터이지만 이 즈음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지도력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대중 심리가 더 우리를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임금을 향하기 전에 백성을 향한 '충(忠)'을 얘기하고 그 백성들이 겁먹고 움츠러들지언정 끝내는 자신을 구하고 돕기 위해 나서는 것에 대해 '천행'이라는 말로 감사할 줄아는 지도자.

진정한 지도자를 그리는 마음은 영화 '명량'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카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기대감을 가득 안고 기다리는 현상 또한 속세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속되지 않다 여겨지는 지도자로서의 프란치스코 교황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도 교황 방한 일정 중 장소가 겹쳐지는 행사에 기꺼이 배려하며 교황이 방한 중 큰 위로가 되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아픈-몸이든 마음이든 정신이든 모든- 이들, 그래서 누군가의 진정성있는 위로가 애달프도록 갈구되는 이들이 그의 방한을 진심을 다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몇백년 전에 죽은 영웅 이순신장군이든, 이역만리 먼 땅에서 귀한 걸음을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든 실상 우리의 삶터에서는 너무 멀리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굳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며 설레고 열광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그런 지도자를 구할 생각을 못하고 있을까. 맹자였던가? 임금이 왜 덕을 구하지 않고 이(利)를 구하느냐고? 크고 작은 이익에 목매다는 현대에 와서 그런 말씀은 그야말로 '공자왈 맹자왈'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양 매도되고 말 사회적 분위기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명분마저 호도해버리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해서는 안될 일이다. 당위가 그러하다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또한 利를 구하는 소인배의 마음이지만 그런 수준의 지도자조차 만나기 힘든게 근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고리타분해 보이는 고전을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책 속에 인간-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섬세하고도 미묘한 소통의 길을 먼저 발견하고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 서로 상대를 향해 '불통'이라고 비난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면 그 누구도 제대로 소통의 그 길을 보는 이들이 있기는 한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운전을 하다보면 낯선 길에 들어서서 어딘가를 찾아야 할 때 분명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가다가도 목적지 다 가서 길을 헤매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대부분은 시야가 좁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벌어지는 일이다. 일전에 지방도시로 문상을 갈 일이 있던 필자도 꼭 그런 실수로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도 십여분 이상을 유턴만 반복하는 짓을 했다. 시골 장례식장 몇번 가 본 경험에 사로잡혀 무슨 리조트 건물같은 장례식장을 눈 앞에 보면서 그곳의 간판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고 네비게이션이 자꾸 주차장으로 들어가라는데 그걸 길로 꺾어들어가라는 신호로 잘못 받아들여 벌어진 시간낭비, 기름낭비, 체력낭비였던 것이다.

이런 실수는 필자같은 평범한 이들이 저지르면 저 혼자 짜증내다 끝낼 수 있으니 세상에 미칠 파장이 거의 없지만 이게 한 사회의 지도자에게서 벌어지면 그 파급효과가 때로는 누대에 미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우리는 그 자리에 합당한 크기의 '그릇'을 갖추길 희망한다.

사회적으로 불안감이 팽배하다면 그건 그 사회가 제대로 지도자를 세우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런 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결여돼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자살 세계 1위국 대한민국의 우울증의 뿌리는 생존의 길에서 마땅한 안내서를 갖지 못했다는 불안감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금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는 심각한 병증이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서로 괴롭히는 괴물로 인식하고 있거나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 때로는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비범한 인물을 설정해 숭배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는 차리리 지금 세상에 없어도 분명 실존인물이었던 이순신장군이나 멀리 있어도 역시 실존인물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기대어 마음의 공허를 메꾸고 싶어하는 것은 건강한 바람일 것 같기도 하다.

<주필>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