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청문회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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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기자] 이완구 총리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을 보수언론에서는 여야의 극한대립으로만 몰아가더니 어떻든 설 이전에 총리 인준 절차를 거치기로 여야가 합의했단다.

박근혜 정부 들어 총리 내정자로서 세 번째 낙마 위기를 겪은 이완구 내정자는 일단 구제되는 분위기로 선회했지만 거푸 총리 내정자들이 낙마하는 사태에 대해 보수언론들은 야당의 지나친 공세라고 한목소리로 질타한다.

한편에서는 특히 보수적인 노년층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인사청문회 자체를 아예 괜히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기나 하는 불필요한 절차로 인식하는 경향도 보인다. 지금의 야당이 집권기간 중 만들어놓고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총리후보를 낙마시킨 전례는 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야당시절 처음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두 차례나.

지금 드러나는 이완구 내정자의 문제들에 비하면 그 때의 낙마 이유들은 단지 낙마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하찮다. 그럼에도 당시 한나라당은 거대 야당의 힘으로 밀어붙여 총리 내정자들을 내쳤었다.

그런 전력을 가진 새누리당이 여당이 되고 나니 새삼스럽게 야당이 발목을 잡아 인사쇄신을 못하고 국정운용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이건 그냥 엄살을 넘어 국민과 야당을 향한 협박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저것 정치적 고려를 해가며 어렵사리 인선을 했더니 인사청문회에서 발목 잡힌 꼴이라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속 답답할 노릇이기는 할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로 타이르지 않았던가. 못 알아듣는다면 대중가요 가사처럼 아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고 풀어줘야 이해 가능하려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과거에 했던 일은 일체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야당이 집권했을 때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하는 일부 언론의 논평이다.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너무 오랜 기간 한쪽으로만 보다 보니 고개가 아예 굳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하긴 요즘 현대인의 일상이 기억력을 퇴화시키는 쪽으로 변해가는 게 아닌가 싶은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하긴 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잃고 생각해보니 모든 연락처가 거기 다 저장돼 있고 별도의 정리를 해놓지 않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전 같으면 최소한 자주 연락하는 전화번호 정도는 외우고 다녔을 텐데 저장기능 탁월한 스마트폰에 의존하다보니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고, 덕분에 한두 개 전화번호 외에는 기억하는 게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명함을 주고받는 관계라면 명함을 다 버리지는 않았으니 챙겨볼 수 있겠지만 가까운 친구들의 경우까지 서로 명함 주고받지는 않는데다 특히 전업주부들의 경우 아예 명함이라는 걸 사용하지도 않으니 이제 당분간은 연락이 이대로 끊겨버릴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이런 환경 탓인지 요즘 국회 청문회에 나서는 이들은 하나같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달고 쓴다. 그 중에는 물론 회피성 답변도 많겠지만 정말 일정 정도는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개인적 체험이었다.

어쩌면 지금 박근혜 정부나 새누리당 입장에서도 과거 야당 시절 자신들이 국무총리 내정자들을 둘씩이나 낙마시켰던 기억은 까맣게 지워버렸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억 따위는 싹 지워버리고 컴퓨터 포맷시키듯 유리한 기억만 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기억력으로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더 얽히고설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

동아시아 3국의 경제 성장기는 한마디로 일본이 맨 처음 고도 성장기를 거쳤고 그 뒤를 우리가 열심히 학습하며 뒤쫓았으며 이제는 우리의 뒤에서 중국이 정확하게 학습하고 뒤쫓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가던 일본이 왜 잃어버린 10년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는지를 잊었고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갈지를 생각할 경험을 버리고 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총리 인준 여부가 아니라 기억 지우기의 달인이 된 우리 사회의 심각한 건망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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