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디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이거나 반드시 디플레이션에 진입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저물가상태가 이어지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만한 수요회복을 조속히 기대할 수 없다면, 디플레이션에 준하는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도 유효수요 회복을 도모하기 위한 대책들을 내놓고 있고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수준으로 내렸다. 그러나 재정과 통화정책수단을 망라한 경기진작 대책도 정부정책에 재원을 공급하고 정책효과를 전파하는 금융부문의 역할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효과는 상당부분 잠식될 수도 있다. 일반적인 경기부진과 달리 디플레이션에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환경 역시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 금융수요자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부채를 보유하고 디플레이션 상태에서는 현금을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실물자산의 가치가 하락해 실질적인 부채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금융공급자로서 은행은 전반적인 대출수요 감소로 인해 자산성장이 쉽지 않은데다 담보가치의 하락, 실질적인 부채부담 증가로 인한 차주의 부채상환능력 약화 가능성을 더욱 중시할 수밖에 없다. 즉, 은행의 금융태도가 더욱 보수화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나라 금융부문의 구조적 취약점으로 지적돼온 대기업 및 우량기업 중심, 담보대출 중심의 관행이 지속되거나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금융부문의 효율적인 자금배분 역할과 정책적인 통화공급 확대를 통해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효과, 즉 성장을 자극하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우리 경제는 산업구조가 성숙되고 기존 대기업군의 성장성이 빠르게 둔화되고 있어 보유자산 및 안정성을 기준으로 한 전통적인 자본배분이 지속될 경우 경제 전체적으로 생산성이 낮거나 후퇴기에 있는 산업과 기업에 자원이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경기부양효과가 성장유발효과가 낮은 퇴조기 산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킬 수도 있고 디플레 압력이 커질수록 이러한 비효율성은 높아질 수도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성장산업의 신생기업 및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성장성 대비 낮은 안정성 등을 이유로 자금공급이 충분히 이뤄지기 어려워 내재된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장산업 및 중소기업으로 적절한 자금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금융회사가 높은 위험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요진작과 통화공급 확대뿐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고 자본이 생산성이 높은 분야로 많이 배분될 수 있도록 금융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지속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