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주빌리 릴레이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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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기자] 국가가 국민의 주인인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가.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분명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고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정부 정책을 보면 늘 국가가 국민의 주인으로 행세하게 한다. 그래서 나라가 잘 살게 되면 국민이 잘 사는 것이고 그 나라를 잘 살게 하려면 돈 벌줄 아는 재벌`대기업을 도와줘야 한다는 논리.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듣다보니 다수의 사람들이 어느덧 세뇌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가 양보해야 하고 소비자가 인내해야 하는 세월을 앞으로도 얼마나 더 살아내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듣지도 못한 채.

그래서 개인이 빚더미에 눌려 허덕대도 국가는 말로만 도울 뿐 실질적 도움 주기에 인색하지만 기업이 부도 위기에 몰렸다 하면 재빨리 재정지출까지 불사하고 나서서 도와준다.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다고 국제금융기구들까지 경고하고 나서는 마당에도 정부의 대책은 쓰러진 국민 위로 멀찍이 건물 꼭대기만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공허할 뿐이다.

그런데 성남시 같은 일부 지자체들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쓰러진 국민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불과 360만원의 대출금을 갚을 수 없어서 취업도 못하고 헤어날 길을 찾을 수 없었던 30대 성남시민이 주빌리은행을 통해 빚을 탕감 받았다. 주빌리은행이 이자가 원금의 4배가량으로 불어나 1천809만여원이나 되는 이 시민의 채권을 1백만원에 사들였고 이 시민은 앞으로 채권매입액을 1년간 매달 10만원씩 갚음으로써 빚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2008년에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해 통장을 압류 당하고 상환독촉에 시달렸지만 통장거래도 불가능하고 취업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됐던 이 시민에게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마련됐다. 대한민국 정부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지자체인 성남시와 주빌리은행이 손잡고 해낸 것이다.

이 대단한 일을 한 주빌리은행은 물론 이름처럼 은행은 아니다. 2012년 미국에서 시작된 시민저항운동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OWS)’에서 시작한 빚 탕감운동 ‘롤링주빌리’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설립된 시민운동조직이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공동 은행장을 맡고 있다.

미국의 OWS는 시민 성금을 모아 헐값이 된 악성 부실채권을 매입해 그대로 버리고 홈페이지(http://rollingjubilee.org)를 통해 모금한 성금과 구입한 채권액을 공개하는 데 올해 9월 24일 홈페이지에는 $31,982,455.76의 부채가 탕감됐다고 떴다. 우리 돈으로 3백억원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모금액은 지난해와 변함없이 70만1317달러에 머물고 있지만 회수가능성이 낮은 불량채권을 헐값에 매입함으로써 모금액에 비해 매우 큰 규모로 부채탕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롤링주빌리가 일정 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부채를 탕감해주는 주빌리라는 기독교 전통에서 나왔다고 하는 만큼 시민모금액으로 채권을 매입해 부상으로 소각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주빌리은행은 최소한 채권 매입액을 상환 받음으로써 시민모금 없이 지속적인 사업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주빌리은행의 부채탕감프로젝트에 대해 도덕적 해이를 염려하는 시선이 있을 수 있지만 이미 여러 해 사회활동에도 제약을 받음으로써 부채상환의 수단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것이나 진배없다. 갚을 수 있는 빚을 갚지 않았을 때 도덕적 해이를 염려해야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빚의 수렁에 빠져버린 개개인들을 외면하는 구실로 도덕적 해이를 들먹일 일은 아닌 것이다.

실상 이 같은 주빌리은행의 일 추진 방식은 금융기관으로서도 어차피 상환불능인 부실채권을 끌어안고 있어봐야 부담만 더 늘 뿐이니 헐값에 채권을 매각하고 손 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만큼 업무가 홀가분해질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지 않은가.

이재명 성남시장은 정부가 1조원의 재정만 투입하면 50조원의 악성장기연체 채무를 탕감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도, 골치아픈 부실채권을 끌어안고 있는 금융기관도 모두 귀담아 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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