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경제정책 변화, 관료들의 발상 전환
[홍승희 칼럼] 경제정책 변화, 관료들의 발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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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 기자] 정권이 보수 정권에서 진보 정권으로 바뀌어도 경제 관료들은 모두 같은 레일 위를 달리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인 형편이다. 경제 관료들만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경제 관료들의 성향이 그렇다보니 경제정책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크게 달라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경제정책이 하루아침에 대폭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발상의 전환은 기대해 볼 법한데 경제 관료들이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보니 눈에 띄는 변화를 기대하던 이들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현 단계에서 경제정책에 기대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골머리를 앓던 여러 난제들은 많다. 그 여러 난제들 가운데서도 저마다 우선순위가 또 각각일 터다. 저조한 수출실적이 제일 큰 문제라 여길 이들도 있을 테고 내수부진, 가계부채 문제, 일자리 부족 등 다양한 문제들을 저마다 해법 찾기의 근본이라 여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답을 똑 떨어지게 옳다고만 주장하기는 물론 어렵다. 근본 문제에 대한 해석이 구구각각이니 당연히 해법을 둘러싸고도 이론이 분분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분명한 관점을 드러내 보여 왔다. 수출주도 성장을 소득주도 성장으로 바꿔야 한다는 명확한 철학을.

부존자원이 절대 부족했던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살길은 오로지 수출뿐이라며 수출주도 성장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제시돼 왔고 또 국민들은 그 논리에 한 치의 의심도 갖지 못한 채 세뇌돼 왔다. 그 논리가 적어도 초기 십여 년 간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파이를 키워 분배하자며 사회 경제적 양극화를 확대시킨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적으로는 많던 적던 경제개발의 혜택이 두루 퍼진 것 또한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런 불균형 성장론이 방향전환의 시기를 놓친 채 너무 긴 시간을 허비했다는 점이다. 고속성장의 단맛에 길들여지다 보니 국가체질은 그 성장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허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유신시대의 종말과 함께 찾아온 변화의 기회는 신군부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놓쳤다. 게다가 세계 경제의 흐름은 신군부의 무능을 덮어줄 만큼 한국경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GDP성장률이 양호하니 국민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눈치 채지 못했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첫 문민정부가 외환관리에 실패하고 국가 부도위기까지 내몰리면서 또다시 경제철학적 변화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IMF 구제 금융을 받고 그 빚을 다 갚기까지 한국경제는 경제정책 방향을 오로지 IMF 입맛에 맞도록 조율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빚은 빠르게 갚았고 한국경제는 다시 변화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구제금융 시기의 악몽이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에 매우 심각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왜 구제 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은 미국에서 들여온 신자본주의 이론에 먹힌 채 가위 눌린 듯 ‘성장’만을 잠꼬대처럼 외워대는 경제 관료들만이 경제부처에 가득했다.

그나마 구제 금융을 받은 상태에서도 김대중 정부는 복지의 중요성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후 역대 정부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에 ‘노숙자’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였기에 정부 입장에서 복지 문제를 소홀히 다룰 수 없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갖고 있던 철학과 관련돼 있었다.

이후 정부들도 진보와 보수를 떠나 복지를 외면하기는 힘들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 정권들에게 있어서 복지란 단지 ‘빈곤층을 향한 사회적 시혜’일 뿐 국민의 권리로 나아가진 못했다.

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확실하게 복지를 경제의 디딤돌로 인식하고 있다. 그 복지를 소득 증대와도 연계시킴으로써 막대한 가계부채 문제와 부진한 내수를 진작시키는 데도 매우 강력한 해법을 제시했고 계획경제 시대 이래로 갈수록 심화되어 온 사회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관점이 다른 보수 야당들의 비판을 넘어 문재인 정부 경제 관료들조차 복지를 경제성장의 도약대로 이해하는 경제 관료가 없는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경제 관료의 양성이 계획경제 시절 구축해 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지다보니 새로운 관점을 지닌 각료 재목을 찾기 어려운 듯 해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이대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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