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가계부채, 희망이 보인다
[홍승희 칼럼] 가계부채,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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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 기자] 지난해에도 가계부채는 꾸준히 늘어 1천450조9천억 원에 이르렀다. 1년간 8.1%인 108조4천억 원 증가한 것이다. 분명 위험한 수준이며 여전히 소득증가를 앞서는 가계부채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당연히 2002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최대수준이다.

그러나 앞으로 경기가 좋아져도 가계부채 규모가 크게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소득이 늘면서 가계부채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을 뿐.

문제는 그 가계부채의 증감추세가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로선 쉽사리 낙관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금융당국이 증가속도를 다소나마 관리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섰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까지 해법 찾기에도 헤매던 것에 비하면 상황이 제법 괜찮아졌다고 볼만한 근거다. 당국이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너무 서두르다 풍선효과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차근차근 소득증가 속도 안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올해 가계부채 증가율을 8% 이하로 낮출 생각이고 궁극적으로는 가계부채 증가가 소득 증가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게 목표라면서 과거처럼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사태에 이르지는 않으리라고 본다고 했다. 그렇게 가면 적어도 가계부채가 이제껏 우려해왔던 우리경제의 ‘뇌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매우 심각한 조급증을 앓고 있다 보니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을 종종 보인다. 그런 조급증은 저성장 시대에 들어선 한국경제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

답답한 상황을 인내할 사회적 합의가 아쉬운 단계다. 이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도심의 교통체증을 맞닥뜨렸을 때의 심정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 전체가 바로 그런 운전자의 심정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그런 상황의 한가운데 들어섰다. 인내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앞으로 우리 경제가 더 앞으로 나간다 해도 과거의 성장속도를 누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우리가 많이 컸다. 국민 개개인도 삶의 목표를 좀 더 편안하게 낮춰야 한다. 요즘 부쩍 늘고 있는 각종 강력범죄도 어쩌면 그 바탕에는 이룰 수 없을 높은 삶의 기대치를 버리지 못한 개인들의 좌절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고 안심하기엔 여러 여건이 여전히 불안하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우리의 예상보다 빨라질 경우엔 분명 현재의 가계부채 수준이 한국 경제 전체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현재로서도 운신의 폭을 좁혀놓은 상태에서 역금리를 감수하게 만드는 큰 악재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은행권에서 주택담보대출을 억제하니 은행권 대출은 다스려지는데 수요가 줄지 않으니 이자가 더 비싼 비은행권 금융기관으로 몰려가거나 카드돌려막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조짐도 나타난다. 당장 생존의 급한 불을 꺼야 할 이들에겐 그런 상황이 선택이 아니라 강요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또한 금융당국이 주의해야 할 부분일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깊이 들여다 볼 문제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가계들을 돌볼 사회적 금융부조시스템이 필요하다. 개인사업자들의 사업자금 융통이 대개는 주택담보대출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1주택 가구의 대출까지 지장 받지는 않도록 할 은행권의 협력도 필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금융교육에도 금융권이 나섰으면 좋겠다. 카드돌려막기의 시작이 20대 초반에 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 중에는 소득과 부채의 함수를 읽지 못하는 금융에 대한 무지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보면 이자 한 푼의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많아 보인다.

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에 살면서 그 욕망을 실현할 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카드사용액이 곧 부채라는 자각도 없이 사용하는가 하면 이자가 높은 카드론도 두려워하지 않고 쓰다가 낭패를 겪는 사례가 과거 한차례 우리 사회를 휩쓴 불법 사채 소동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했었다.

현재의 가계부채 수준은 잘 관리하면 희망이 되고 자칫 실책이 나오면 사회적 ‘뇌관’이 되는 경계선에서 희망 쪽으로 반보쯤 돌아섰다. 이제부터가 정말 한발짝도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딛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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