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금리인상 압박…그린북 '회복세' 문구 삭제
[서울파이낸스 김희정 기자] 내년 기준금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금리결정 칼자루를 쥔 한국은행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과 금리 격차가 벌어지며 자본유출 압력이 커진 가운데, 경기 하강국면에서 긴축으로 방향을 틀 경우 향후 경기부진 책임을 져야하는 '독박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2일 금융권에서는 한은이 '금리 실기론'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달과 11월 올해 두 차례 남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한 차례 금리인상이 기정사실화 됐지만, 이 마저도 정부·여당의 전방위적 압박과 미국 금리인상 직격탄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 비판이 적지않다.
지금까지 나온 고용, 심리지표, 투자 등 실물지표 추이를 보면 우리경제가 금리인상을 단행할 정도로 견조하지 못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부마저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했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기획재정부는 이날 내놓은 9월 경제동향(그린북)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수출·소비를 중심의 회복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경제의 미래동력인 설비투자는 올해 8월까지 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이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최장 감소세를 이어갔다. 수출 1위 효자인 반도체 업체들이 투자를 마무리한 탓에 불안한 신호가 감지된다. 건설투자는 건축과 토목 공사 실적이 모두 줄며 8월 기준 1.3% 축소됐다.
문제는 내년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경제는 지난해 2분기를 정점으로 1년 이상 경기 하강국면에 위치하고 있다"고 짚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기존 대비 0.3%p 하향조정한 2.6%로 제시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와 아시아개발은행(ADB)은 모두 2.8%로 전망하며 본격적인 경기 하강 우려가 더 커졌다.
올해는 한은이 금융안정, 즉 금융불균형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올린다 하더라도 본격적인 경기 둔화가 예상되는 내년에는 뚜렷한 금리인상 명분찾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섣불리 금리를 올렸다가 경기가 가파르게 늪에 빠질 경우 독박 책임론이 불거질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금리격차는 더 커지며 금융시장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버틸 수 있는 미국과 금리격차를 최대 1%로 본다. 현재 한미 금리차는 0.75%p다. 전날 시장은 미 금리 파워를 여실히 실감했다. 가파른 미국 금리인상 가능성에 급등한 미 국채 금리는 아시아 시장에 '검은 목요일'을 불러왔다. 이날 하루 코스피 시가총액은 65조원이 증발했다.
황세운 자본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 상황을 보면 현재 전혀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인데도 미국이 내년 세 차례 금리인상을 예고했기 때문에 한은도 이 스케줄을 따라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 압박 등) 내외적으로도 한은이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이 작년, 재작년 경기가 좋을 때 선제적으로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인상 타이밍을 놓쳤다는 '금리 실기론'은 결국 한은이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홍범 경상대 교수는 "중앙은행은 어떤 시점에서는 금융시장을 선도해야할 책무도 가지고 있는데 '너무나' 신중한 한은이 시장을 따라가는 모습만 보이고 있어 안타깝다"며 "정부 인사들의 금리발언은 당연히 부적절하지만 일부에서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공감하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