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김혜경 기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문명사회의 척도다. 24시간 전기와 생활하는 현대인에게 블랙아웃(대정전)은 단순한 암흑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는 생사기로에 놓여야하고, 도로는 마비되며, 원자로 냉각 상태를 점검하면서 가슴을 졸여야 하는 극한의 공포 상황이다. 평소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전기의 존재감이 무겁게 다가온다. 스마트폰을 포함해 첨단 IT 기기들도 전기 공급없이는 무용지물인 시대 속에서 전기는 의·식·주와 같다. 발전소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면서 에너지산업에도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에너지 분야 화두는 두 가지로 축약된다. 첫번째는 에너지 전환, 두번째는 새로운 기술과의 융합으로 발전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인지다. 산업 기술 변천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발전소의 디지털화는 4차 산업기술과 맞물려 '퀀텀점프'를 준비하고 있다.
◇ 플랫폼+솔루션의 융합···데이터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
디지털발전소란 각종 정보를 디지털 및 지능화를 통해 데이터로 만들고, 해당 데이터를 이용해 설비를 효율적으로 운전하고 정비할 수 있는 발전소다. 설비의 이상 상태를 사전에 감지하고, 인간이 발견하기 힘든 미세신호까지 발견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국내에서는 한국전력 산하 전력연구원이 '지능형디지털발전소(Intelligent Digital Power Plant,IDPP)'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배용채 전력연구원 부원장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 관련 기술들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해당 기술들과 접목해 발전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라면서 "그동안 사람이 했던 것을 디지털 및 지능화함으로써 발전소의 전체적인 자산 관리를 잘하도록 만드는 것이 IDPP의 개념"이라고 말했다.
발전소는 기계와 전기, 화학 등이 모여있는 기술집약적인 곳이다. 설비에 센서를 설치하고 각 센서에서 모이는 발전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이상 작동, 고장 등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이 인지할 수 없는 미세신호를 센서로 잡아내는 것이다. IDPP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각 센서에 데이터가 원활하게 모일 수 있도록 별도의 플랫폼이 필요하다.
배 부원장은 "플랫폼은 쉽게 말해 냉장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는데 냉장고에 보관된 식재료들이 바로 데이터"라면서 "플랫폼 외에도 감시와 진단을 할 수 있는 솔루션도 필요하다. 솔루션은 스마트폰에 설치된 어플리케이션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발전소 운영은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기 생산과 연계된다. 운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방식으로 최적 시점에 정비를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현재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문제 여부와 관계없이 각 설비를 분해한 후 정비를 실시한다. 그러나 향후 디지털화가 되면 '상태 기반 모니터링(Condition Based Management,CBM)'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배 부원장은 "대다수 국내 발전소에 외국 제작사 설비가 사용됐다는 점과 제도 관련 민감한 문제들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겠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CBM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추후 정책적인 부분이 해소가 되고, IDPP가 궁극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될 경우 정비 시점을 최적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종민 전력연구원 발전기술연구소 지능형발전연구실장은 "CBM 외에도 위험기반검사(RBI), 신뢰성기반 예방진단(RCM) 등의 방식이 있는데 정비 주기가 짧아진다는 장점이 있다"면서 "만약 기술 실증이 가능해질 경우 국내에서는 전력공급 안정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대신 해외사업에서 우선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IDPP 관련 국내·외 움직임은?···"4차 산업기술은 일종의 기폭제"
해외에서는 제조업 플랫폼을 발전 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제너럴일렉트릭(GE)과 지멘스다. 2016년 GE는 산업용 빅데이터 플랫폼 '프레딕스(Predix)'를 개발했다. GE는 항공과 교통, 공장, 발전 등의 분야에 산업인터넷을 응용, 기계에 부착된 센서에서 데이터를 수집·처리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만드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다만 몇 년 전과는 달리 현재 GE는 프레딕스 사업 관련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 부원장은 "발전 분야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데 제작사다 보니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서 "발전사에서 왜 자신들의 데이터를 GE 플랫폼에 집어넣냐는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플랫폼 확대가 목적이었던 GE와는 달리 지멘스는 2017년 스마트팩토리를 만들 목적으로 '마인드스피어(MindSphere)'라는 플랫폼을 내놨다. GE가 산업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범용 빅데이터 플랫폼을 만들었다면 지멘스는 공장 자동화로 시작해 에너지 분야에 특화된 플랫폼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현 시점으로 아직 완벽하게 디지털 발전소가 구현된 곳은 없다. 미국의 경우 샬롯(Charlotte) 지역 가스터빈 공장에 마인드스피어가 적용돼 있거나 일부 발전소에는 프리딕스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사인 듀크파워, 서든에너지 등은 자체적으로 실시간 데이터베이스(Real-time database) 처리 플랫폼을 만들어 발전소 감시를 하고 있는 상태다.
배 부원장은 "미국에서는 조기경보(Early Warning) 시스템 등을 타사에서 구매한 후 발전소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감시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단계"라면서 "듀크파워의 경우 과거 변압기 사고 이후 감시 시스템을 만들자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감시 부문에서의 디지털화는 완성했지만 진단 시스템은 아직"이라고 말했다. 미국 전력연구소(EPRI)에서는 각 전력사마다 실시 중인 발전소 디지털화를 묶어서 관리하기 위해 'I4Gen(Insight through the Integration of Information for Intelligent Generation)'이라는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MHPS에서 자신들이 제작한 제품 관리를 위해 '토모니(Tomoni)'라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전력연구원 주도로 IDPP 모델에 대한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현재 IDPP 연구는 투 트랙으로 진행 중이다. 2017년부터 시작된 'IDPP 1' 과제는 한전에서 자체적으로 하고 있던 연구를 토대로 차세대 발전소의 기반을 구축하는 내용이 골자다. 마인드스피어나 프레딕스와 같은 통합 관리 플랫폼 '허브팝'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발전시스템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개발을 완성해 2020년부터 발전사별 적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구원은 허브팝을 기반으로 각 발전사로부터 받은 데이터를 이용해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AI 기술 등을 이용해 발전 설비 감시·진단·예측 시스템을 개발한다.
'IDPP 2' 과제는 지난해 초 김종갑 한전 사장 등 전력그룹사 경영진 모임 이후 시작됐다. 2001년 발전사 분리 이후 운영 데이터 공유가 서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디지털 발전 관련 기술 개발도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외국 기술에 종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불필요한 중복 투자를 막기 위해 한전과 각 발전사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3년 초까지 1·2차 IDPP 과제를 마무리짓는다는 목표다. 현재 초초임계압(USC) 화력발전소인 신보령에는 7개의 개별 진단 시스템 및 통합운영 감시시스템이 적용돼 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면 발전소 자율운전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발전소 운영 효율을 위해 그동안 축적된 기술들과 함께 4차 산업 기초 기술들이 등장하면서 연구·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전환도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실장은 "신·재생에너지가 계통에 병입되는 상황에서 한편으로 기저발전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운전 안정성과 자산, 정비에 대한 기존 프레임이 흐뜨려질 경우 어떻게 다시 최적화를 할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에 대한 대응 방식 중 하나로 IDPP가 부각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