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특금법 시행령 나왔지만···갈 길 먼 '가상자산 제도화'
실명계좌 발급, 은행 손에···모호한 기준 논란 '여전' 중소 업체 고사위기···투자자 피해 우려도 ↑
[서울파이낸스 이진희 기자] 암호화폐 거래소의 운명이 사실상 은행 판단에 맡겨지면서 업계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거래소가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은행의 실명계정 발급이 필수인데, 열쇠를 쥔 은행권에서 아직 리스크를 떠안기 꺼리고 있어서다.
명확하지 않은 실명계정 발급 요건도 불안 요소 중 하나다. 일각에선 대형사를 제외한 중소 업체의 진입 문턱만 더 높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3일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자금세탁방지 의무 부과를 골자로 한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선 가상자산 사업자로 신고하는 데 핵심인 실명입출금계정 발급 기준을 5가지로 명시했다. 가상자산 사업자는 고객 예치금, 거래내역을 분리·보관해야 하고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획득이 의무화된다.
특히 은행에 관리 의무가 주어졌다. 은행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시스템, 업무지침을 확인해 자금세탁행위의 위험을 식별하고, 분석·평가해야 한다. 사업자가 나머지 요건을 갖춰도 은행이 실명계정을 발급해주지 않는 경우 영업이 불가능한 구조다.
이 조항에 대해 곳곳에서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명계정 발급이 가능한 객관적 요건이 정해져 있다면 이를 충족시키면 될 일이지만, 은행의 주관적 요건은 그 기준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암호화폐 거래소에 실명계정 발급을 내주는 은행들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보안 수준 △이상거래 탐지 및 제어 프로세스 △사고예방 탐지 대책 등을 따지고 있다. 다만 정해진 기준이 없는 만큼 요건은 언제든지 변동되거나 추가될 수 있다는 게 은행권 설명이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자금세탁 리스크를 방지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면 된다고 설명하지만, 은행이 거절한다면 사업을 접어야 한다"면서 "기다렸던 특금법 시행령이 나왔음에도 불확실성이 여전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은행권도 자금세탁행위를 방지하는 의무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아무래도 은행권이 신사업에 보수적인 만큼 내부에서는 수수료 수익보다 리스크에 대한 부담을 더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관련 비용도 늘어날 테지만, 가상자산 사업자에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론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업계에선 경영 불확실성과 경제적 부담 탓에 대형사를 제외한 중소형 업체들이 고사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현재 은행과 실명입출금계정 계약을 맺고 있는 거래소는 빗썸과 업비트, 코인원, 코빗 등 4곳이 전부다.
내년 9월까지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암호화폐 거래소, 지갑 업체 등은 합법적인 사업을 할 수 없다. 미신고 사업자가 늘어난다면 투자자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은행이 실명계정 발급을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명시해두지 않는다면 규모가 작은 업체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만 커질 것"이라며 "중소 거래소가 문을 닫으면 암호화폐를 맡겨 놓은 고객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