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의 세상보기] 생명도 앗는 권력의 비틀어짐
꿈 많은 소녀는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집에서는 말썽쟁이로 부단히 엄마 속을 썩였습니다. 말썽만 피우던 애가 느닷없이 군에 관심을 보이며 부사관이 되고 싶다며 현직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 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곳인데 아는게 없어서요.
결국 수소문해 현직에 있는 분을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부사관 언니를 만나 조언을 들으며 간접적인 체험을 할 수 있고 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조언을 해준 부사관도 엄마에게 아이가 매우 바람직하고 부사관으로 적합하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줘 엄마는 기뻤습니다. 골칫거리였던 아이가 온당한 평가를 받으니 날아갈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부사관 되는 것이 높은 경쟁률로 매우 어렵다 합니다. 그래도 이 소녀는 현직 부사관 조언을 듣고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국방부는 ‘2018∼2022 여군 인력 확대 추진 계획’이라는 것을 세웠죠. 2022년까지 여군 간부의 비중을 8.8%로 높이겠다는 내용입니다. 주요 직위에 여군 보직을 확대하고, 여군의 상위계급 진출도 향상시키겠다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공군 여(女) 중사의 자살 사건으로 세상이 경악에 빠졌습니다. 상급자인 남(男) 중사로부터 회식 자리에 나올 것을 강요받고 그것도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성추행까지 당했습니다. 여 중사의 자살은 혼인신고를 한 날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 중사가 이미 신고를 했음에도 늑장 처리가 이뤄지고 은폐하기에 급급한 등 제대로 된 조사도 이뤄지지 않자 한 청춘은 이 세상을 저버린 것입니다. 군 부대 상관들은 여성 부사관을 보호하기는커녕 "없었던 일로 해 달라"며 합의를 종용하거나 조직적으로 회유하거나 은폐하기에 바빴다 합니다.
이에 병영문화를 개선하자, 민간이 나서 바꿔보자 등 많은 의견이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부사관 이상 상급자가 가진 생각과 관행, 이를 둘러싼 조직문화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요원해 보입니다.
이미 8년 전인 2013년 10월 15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던 여군 오 대위는 직속 상관인 A소령으로부터 업무상 가해와 성적인 강제추행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당시 가해자인 A소령은 오 대위에게 "하룻밤 자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식의 노골적인 성추행을 했죠.
군대는 일반 조직과 달리 전시에 대비해 상명하복의 기강이 중요하겠지만 그 기강의 힘은 ‘바른’ 상급자로부터 나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소유위령(小有違令) 즉당군율(卽當軍律) (군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참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일이 기강과 관련한 일인가요? ‘바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을 중시하는 군이어도 상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식이 부재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번 사건은 부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군 내부의 취약점을 보여준 점에서 큰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군 내에서 성범죄, 갑질 행태가 잇따르자 국방부는 '무관용 원칙'을 발표한데 이어 2015년에는 '성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하고 나섰지만 상황은 반복되고 있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2019년 국방부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수는 32.7%에 그쳤습니다. 나머지 보고하지 않은 응답자들은 `아무 조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았다(44%)'고 답했습니다.
부사관 언니를 만나 꿈을 키운 그 소녀는 여 중사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청춘들이 꿈을 잃고 있는 세대. 이제 군까지 이러하면 청년들이 기댈 곳이 없습니다. 군 당국은 이런 점에서 조직문화 특히 상급자의 의식문화를 혁명 수준으로 바꿀 결의와 함께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찰과 개선의지가 필요합니다. 은폐를 통해 책임회피와 자리보전을 위한 권력의 비틀어짐은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군 외 학교 등지에서도 이러한 유사사례는 얼마든지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