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의 세상보기] 한글 대신 '오픈·론칭' 유감
서울 하계동에 한글로 된 오래된 비석이 있다. 그것도 보물이다. 상계동으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이윤탁 한글 영비’가 있다. 조선시대 이윤탁 묘에 한글로 된 묘비라니 신기하다. 한글 영비는 이윤탁의 아들 묵재 이문건이 썼다 한다.
한글로 쓴 이유는 아마도 효심에서 묘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경고성 비문 한글 내용도 ‘범하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으리라. 이는 글(한문)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라고 써 있다.
비 동쪽 측면에는 당시의 엘리트층을 향한 ‘불인갈(不忍碣)’이라는 경고문과 서측 측면에는 ‘영비(靈碑)’라는 한자 제액(題額) 아래 세로 두 줄의 순 한글 경고문을 새겨 넣었다.
이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약 90년 후에 최초로 세워진 금석문으로서 높은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묵재 이문건이 시묘하면서 매일 하루 평균 5자 꼴을 각자했다 하니 그의 정성과 효심이 느껴진다.
9일이면 한글날이다. 덕분에 대체공휴일 월요일을 쉬니 힐링 하나 추가여서 좋다. 그래도 한글날 취지 정도와 한글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한다.
지금도 기사 제목에 오픈, 론칭 등 굳이 한글이 있음에도 영어를 쓰는 것을 보면 한글날은 그냥 쉬는 날일 뿐이다. 한글로 옮기기 어려워 쓰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한글이 있음에도, 기존에도 쓰임에도 영어를 쓰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
오픈은 사무실 ‘개소/개설/공개/연다’ 등의 단어가 있고 론칭 역시 서비스 ‘개시/시작’ 등이 있다. 그럼에도 오픈, 론칭 등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글 사용에 대한 자부심이 낮고 사대 정신이 있고 일종의 베껴쓰기 때문이다. 보도자료에 그리 쓴 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쓰는 것이다.
바로 잡는 것이 기자이고 언론인데 이런 것 조차 잡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판적 정신을 대단한 것에만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인지. 한글날을 맞아 이런 얘기한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차제에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굳이 외국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오히려 우리말로 표현하면 의미도 더 가깝게 와닿고,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찾는 노력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우리가 평범하게 쓰는 한글은 영어말고 그대로 쓰자.
코로나19로 ‘언택트’ 등과 같은 외래어도 넘쳐난다. 비대면으로 써도 될 것을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자주 사용하고 있을 만큼 유행이 돼버린 단어다. 언론의 무비판적 수용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언론의 역할을 망각한 자세다. 그래서 필자부터, 우리부터 반성해 본다.
500여년의 춘추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평정한 진시황제는 분서(焚書)라는 극단적 방식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통일했다.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할 정도였다. 통일된 언어와 문자를 갖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유네스코에서는 200년 이내에 한글이 소멸될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디지털로 지구촌이 한 동네가 되는 국제화·글로벌 시대니까 한글 대신 영어를 쓰는 게 맞을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