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더 막막"···'책준형' 내세웠던 신탁사, 불황 돌파구 없나
신탁사 14곳, 올 상반기 2467억원 적자 전환 부실 사업장 자체 투입금 1년새 1조원 늘어
[서울파이낸스 박소다 기자] 국내 부동산 신탁사들이 최근 적자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경색이 이어지면서 문닫는 건설사가 늘어나자 일종의 연대보증을 섰던 신탁사에도 불똥이 튀면서다. 아울러 정부 정책 기조가 신탁사에 불리하게 작용되며 최근 신탁사 대신 조합 방식으로 선회하는 정비사업장이 늘고 있어 불황 돌파구를 찾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부동산 신탁사 총 14곳은 2467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며 2009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처음 적자전환했다. 총 2606억원의 흑자를 냈던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하면 1년 새 영업환경이 크게 악화한 것이다. 14곳의 신탁사 중 12개사의 영업이익이 줄었고, 특히 △신한자산신탁(384억원→1751억원) △KB부동산신탁(571억원→-1122억원) △교보자산신탁(341억원→-940억원) 등의 적자가 크게 늘었다.
이 같은 실적 부진은 그동안 신탁사들이 적극적으로 진행한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책준형 신탁)의 충당금·추가 투입비 증가 탓으로 풀이된다. 규모가 작고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 시공사는 공사에 앞서 대출을 위해 신탁사에게 보수를 주고 신용공여를 맡긴다. 신탁사는 자기 신용으로 PF대출을 실행하며 대주단에 책준형 신탁을 약속하게 된다. 약속 기한 내 공사를 마치지 못할 경우 발생하는 모든 비용(채무)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계약이다.
문제는 지속된 건설 경기 침체로 문을 닫는 건설사가 늘고, 부도 사업장이 많아지면서 신탁사들의 보증 리스크가 커졌기 때문이다. 나이스신용평가 발표 기준 보면 PF 부실화가 시작된 지난해 기준 이미 책준형 신탁 사업장 중 약 23%가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아울러 올해 전국 부도 건설사 수도 2019년 이후 최다 수준으로 늘어났다.
신탁사가 이 같은 부실 사업장에 자체 투입한 자금(신탁계정대여금)도 2022년 말 2조5000억원, 지난해 말 4조900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6조원으로 크게 뛰었다. 부동산 활황기 신탁사가 수주한 책준형 신탁 가운데 많은 곳이 올해부터 내년 상반기 만기가 집중돼 있는 점, 또 대부분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 건설사 위주의 사업장이라는 점 때문에 신탁사들의 자체 자금 투입이 계속 늘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자금 투입으로 사업이 지연되지 않는다 해도 안심할 수는 없다. 진짜 위기는 준공 후 미분양이기 때문이다. PF대출에서 신탁계정대여금은 금융기관 대비 후순위로, 대출을 다 갚은 후 회수할 수 있는 자금이다. 책준형 신탁이 중소 건설사, 지방 위주에 사업장이 몰려있는 것을 고려하면 현 시장 상황에서 손실은 확정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재무 부담에 신탁사들은 올해 책준형 사업을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책준형 신탁이 과거 주요 수입원이었던 만큼 그 부재가 또 다른 실적 어려움을 낳았다. 올해 상반기 신탁사들이 수주한 정비사업지는 8곳, 수주액은 554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신탁사 정비사업 수주액이 2313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실적이 크게 준 데다가, 지난해 대비 올해 총 정비사업 규모가 20%가량 늘어난 것을 고려했을 때 이 같은 실적 감소치는 더 크다.
아울러 빠른 사업 추진을 강점으로 내세운 신탁방식의 정비사업 장점도 올해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에서 재건축 규제 완화 기조가 이어지며 무색해진 분위기다. 당초 정비사업에서 신탁 방식이 고려됐던 이유는 추진위·조합설립 단계를 건너뛰고 신탁사가 직접 업무를 진행해 사업 기간을 1~2년 줄일 수 있어서였다. 이를 대가로 신탁사는 사업비의 3~4%의 높은 수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추진이 가능한 '재건축 패스트트랙'은 조합 사업장에만 적용될 거라 예고된 상황에, 서울시도 조합 방식에서 사업시행 전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 서울시와 5대 광역시에선 조합방식이 신탁방식보다 오히려 사업절차가 셈법이 나왔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에 대한 표준계약서 지침 마련으로 계약 해지가 비교적 쉬워진 점도 신탁사 영업 환경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아직 신탁 방식으로 준공된 재건축 사례가 많지 않은 탓에 전문성 논란도 늘 따라다닌다. 높은 수수료를 지불할 만큼 신탁방식의 장점이 큰지에 대해 의문이 일자 일부 사업장은 신탁 방식에서 조합 방식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대교아파트 재건축이 KB부도산신탁을 예비시행자로 선정했다가 신탁사가 시행자 지정 요건에 맞추지 못해 조합 방식으로 선회했다. 서초구 방배삼호아파트는 한국토지신탁과 재건축사업을 추진하다 지난해 조합방식으로 변경했고, 신반포4차와 방배7구역 또한 주민 반발 등으로 결국 조합방식을 택했다.
상황이 이렇자 올해 진행된 신탁방식 정비사업장 수수료는 크게 떨어지고 있다. 최근 양천구 목동 13단지 입찰에서 재건축준비위원회는 예비신탁사 선정 입찰에서 신탁 수수료율로 역대 최저치인 0.35%를 제시했다. 대신자산신탁이 해당 입찰에 참여했다.
대신자산신탁 관계자는 이에 대해 "0.35% 수수료율이 작아 보여도 매출액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니다"라고 입찰 참여 배경을 설명했다.
다른 신탁사 관계자도 "한때 5%에 육박했던 서울과 수도권 정비사업장의 신탁 수수료율이 현재 1~2%까지 떨어졌고, 핵심 단지의 경우 1% 미만"이라며 "사업성이 좋은 곳은 사업추진 탄력이 좋은만큼 신탁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고, 소유주들은 사업 조건 등에 대한 의견이 더 조합 방식에서 더 잘 반영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