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폭 지점장
4-조폭 지점장
  • 서울금융신문사
  • 승인 2003.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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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엎치락뒤치락 시소를 거듭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판세는 정해졌다.

15대 대통령 당선자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38만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확정되었다.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전임 장 행장을 면회하고 나오는 평일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옆자리의 김 변호사는 아침부터 줄곧 똑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도통 얼굴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법으로 먹고사는 인간들은 언제나 저렇게 무표정한가.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는지 출렁하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라디오에서는 아침부터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씨의 고난에 찬 일대기를 읊어 대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권력의 축이 바뀜에 따라 당분간 저런 ‘김비어천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김변호사의 전화는 평일을 하루 종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행 장님, 저 장 행장님 변호를 맡고 있는 김갑숩니다.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으시죠.”

평일은 처음에는 김변호사의 전화를 받고 ‘아, 이제는 내 차례구나. 그런데 이제부터 무얼 어떻게 하지. 요즘은 변호사를 통해서 출석요구를 하나. 난 김 변호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왜 검찰이 이사람을 통해서 나오라는 말을 하지? 전임 행장의 변호를 맡고 있어서 그런가.’하고 순간 생각했다.

커피잔을 든 손이 눈에 띨 정도로 떨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장 행장님께서 김 행장님을 한번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지금 제가 장 행장님을 면회가는 길이니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곧 본점 로비에 도착할 겁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비서는 같이 오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차도 제 차를 이용하시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통고를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평일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로 웃옷을 주워들고 평일은 당황한 얼굴로 뒤쫓아 나오는 박 상태 차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수행할 필요 없어.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오늘 약속은 모두 연기해 줘.”

김 변호사의 검정 세단은 이미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위가 황당한 표정으로 남의 차를 얻어타고 사라지는 행장의 뒷모습에 차려 자세로 경례를 부쳤다.

장 행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초최했다. 과거 행장실에서 보던 위엄과 권위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김 변호사를 보자 비굴한 웃음부터 지어 보였다. 평일을 보고서도 얼마 전까지 은행에서 대해오던 모습과는 달리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몇 오리 남지 않은 머리는 그사이 더욱 희어졌고 혈색도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평소 화색이 돌던 얼굴이 당뇨 관리를 제대로 못해선지 검은 빛이 돌았고 검버섯도 늘어난 것 같았다.
“고생이 많습니다. 행장님. 건강은 괜잖으신지요.”

평일은 옛날 모시던 생각 반, 측은한 마음 반해서 진지하게 안부를 물었다.

“나야 뭘. 뒤늦게 인생 수업하고 있는 중이지. 그나저나 김 행장이 고생이 많소. 요즘 은행이 말이 아니지요.”

장 진수는 평일의 손을 덥석 잡더니 다시 한번 입가에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장 행장이 고개를 돌려 김 변호사를 돌아보자 김 변호사는 마치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 진수는 평일의 소매를 잡아끌더니 거의 이마를 부딪칠 것처럼 머리를 마주 대고 속삭이듯 중얼거린다.

“김 행장, 우리은행을 동방은행과 합병시킨다는 소문이 있던데 알고 계시지요. 어떻게 하든 대성은행 간판을 내리면 안됩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김 행장에게도 기회가 올거요. 우리 대성이 살아남아야, 김 행장도 잘되고 나도 살수 있습니다. 부디 대성은행 간판을 지켜주시오.”

평일은 내심 속으로 감탄을 안 할 수 없었다.

‘이 양반은 감옥에서도 정치를 하나, 은행 돌아가는 사정을 꿰고 있구만.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재경부 장관이라도 된다 말인가. 멋대로 은행간판을 올리고 내리게’

평일도 대성은행을 동방은행에 합병시킨다는 소문이 얼마 전부터 과천에서부터 나돌기 시작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동방은행도 부실기업과 엮기기는 대성은행과 마찬가지였으나 비교적 손실 규모가 적었고 행장이나 임원 중에도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행장의 정치력 이전에 우선 경영을 건실하게 해왔던 것이다. 역사는 대성은행에 비길 바가 못되었으나 경영능력은 한 수 위인 소위 말하는 후발 대형은행이었다. 당연히 공적 자금 투입 규모도 얼마 안 되어 두 은행이 합치면 합병 주도권은 동방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글쎄, 그게 지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저쪽 동방이 자산 규모도 더 크고 현재 우리 쪽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은 노조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김 행장을 보자고 한 것이 아니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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