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희망 그리고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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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복권이 발매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로또만큼 거액은 아니지만 매주 2명의 1등 당첨자에게는 20년간 매월 5백만 원이 지급되는 이 복권은 그동안 복권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들의 관심까지 끌어 모으고 있다.

복권뿐만이 아니고 연금저축이니 연금보험이니 해서 ‘연금’이라는 이름을 단 금융상품들에 중산층이라면 너나없이 관심을 갖는다. 요즘은 아예 연금형 부동산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노후 안정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표현이다. 실업률은 높고 직업 안정성은 낮아진 시대, 늦은 결혼에 길어진 교육기간, 길어진 수명에 빨라지기만 하는 퇴직 시기 등으로 현대 한국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옛 사람들에게는 자식이 연금이었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나간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모 부양의 의지도 예전 같지 않겠지만 설사 뜻이 있어도 능력이 따라주기 어렵다. 그런 현상을 보여주는 현상이 최근 늘어나는 노인 자살이다.

그 중에는 자녀 부양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에 정부 지원마저 끊기니 겉으로는 자살이지만 사실상 사회적 타살인 경우가 많다. 정부는 자식들이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현 정부 들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생계비 지원이 끊기는 사례가 늘면서 이런 형태의 노인 자살도 따라서 늘고 있다. 가뜩이나 사회적 부양이 빈곤한 한국 사회에서 정부의 몇 푼 안 되는 지원금마저 줄어드니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복지부가 뒤늦게 기준을 높였다고는 하나 현행 기초생계비 지원 대상 선정 기준인 자식의 재산 1억2천836만원이면 소형 아파트 전세비로도 넉넉하지 않다. 그게 없어도 자식의 월 소득이 4인 가족 기준 256만 원 이상이면 일단 부모 부양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월 평균소득 256만원이면 학생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4인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차다. 자녀들의 학업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면 이런 자식들에게 부모 부양의 의무를 강제하는 것은 빈곤의 대물림을 강요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일이며 사회 전체적으로 희망을 죽이는 일일 뿐이다.

세계적인 국가 성장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던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의 바탕에는 한 세대가 고생하면 적어도 다음 세대에는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 희망이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을 스스로 감내할 수 있게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에 매달리게 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저축하게 한 것이다.

그때는 비록 사회 전체적으로 가난을 수용하며 살았지만 적어도 사회적 절망으로 인한 슬럼화의 진전은 없었다. 사회복지 수준은 지금보다 더 열악했지만 자식이 연금이 될 가능성도 지금보다는 높았다.

그러나 이제 국가는 세계 12위니, 13위니 하며 잘 살게 됐고 예전처럼 땟국물 흐르게 살지 않게 됐다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불안은 오히려 더 커졌다. 내일이 불안하면 오늘의 삶도 불행하다.

이제 자식들에게, 가족에게 의존하는 사적 복지의 시대는 산업화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물러가고 있다. 그런데 공적 복지를 향한 사회적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그래서 이 땅의 노인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할 중장년층, 청년층이 모두 불안하고 불행하다.

이제까지 복지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정도에 머물렀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극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이 사회적 보장을 필요로 하도록 변해가고 있다. 국민이면 누구나가 안심하고 늙어갈 권리를 사회가 제도화해야만 하는 시대가 닥친 것이다.

국민이 잘 살아야 소비도 늘어 기업도 살고 나라도 부강해지지 않겠는가. ‘성장’에 목매다는 정부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답이 보일 텐데 그저 단지 ‘복지’를 잘못 말하면 좌파 아니면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기 급급하니 더욱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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