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시대의 금융
명품시대의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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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에선 다른 FTA 협상 때와 달리 유독 ‘명품’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져 보인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명품’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반 명사에서 세계적인 고가 브랜드 제품을 이르는 고유명사화 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대중 미디어들도 뉴스에 버젓이 ‘명품 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우리 제품들을 졸지에 무명소졸로 만들어버린다.

그 배경에는 아직 세련미에서 2% 부족한 우리 제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콤플렉스도 깔려 있는 성 싶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에서 시작된 명품 선호 열기가 지금은 거의 광풍처럼 소득수준의 차이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을 휩쓸고 있다.

덕분에 지난 2~3년간은 컨테이너 하나 분량을 수출한 대금이 손 안에 쥘만한 명품 브랜드 액세서리 하나와 맞바꿔지며 산업현장 일꾼들을 맥 풀리게 했다. 그리고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적자 수지를 겪어야 하는 참담함을 맛봤다.

품질의 차이가 그리 클 리는 없다. 그런데 가격은 몇 십 배 혹은 몇 백 배로 벌어지는 게 고가품 시장의 현실이다. 이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브랜드 값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우리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우리 사회는 아직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일이년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닌 탓이라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전반으로 보면 브랜드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의 소위 ‘가진 자’ 그룹이 막무가내로 선호하는 고가 명품 브랜드의 대부분이 유럽 제품이다. 그 이유는 유럽 각국이 미국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80년대 이후 지속해온 산업 전략에 있다.

미국과의 물량 경쟁을 버리고 경쟁력의 핵심을 고부가가치 산업에 둔 유럽 여러 나라가 고급스럽게 마무리된 디자인으로 지금 한국 사회 상류층의 소비 열풍을 이끄는 소위 명품 브랜드를 집중 육성했다. 그리고 이제 소량 다품종 시대인 21세기의 새로운 경쟁력을 다져가고 있다.

반면 부지런히 국가 주도의 대규모 제조업으로 고속성장을 추구해온 한국 사회는 미처 궤도 수정을 못한 채 21세기를 맞아 제조업이 갈 길을 모색하는 데 여러 해를 허비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은 우리의 뒤꽁무니를 잡고 이제 나란히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사회적 피로를 보이는 우리와 달리 기운차게 달리는 중국의 위협만으로도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승부하기는 힘겨워졌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실상 제조업 내에서만 궤도 수정을 못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차 산업 위주 사회를 2차 산업 사회로 진전시킨 5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 다음 단계는 당연히 3차 산업 사회로의 도약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민간의 역량이 커진 단계에서 과거와 같은 계획경제도 추구할 수 없는 정부가 그런 변화를 충분히 이끌기는 무리다.

다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적 재화를 3차 산업으로 집중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일인데 그게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질 못했다. 국가사회의 논의가 충분치 못한 탓도 있고 계획경제 시절의 꿀맛에만 길들여진 채 사회적 리더십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재벌 시스템과 그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불신이 충돌한 탓도 있다. 그 틈을 열릴 대로 다 열려버린 대문을 밀고 들어온 외래 자본들이 이곳저곳 끼어들어 휘젓고 있다.

그 틈에서 금융 산업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일찌감치 세계 표준을 습득하고 외래 자본과의 공존과 경쟁을 경험했다. 이쯤이면 상황에 익숙해질 때도 된 성 싶지만 그러나 아직 브랜드 값을 확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덩치 키우기에 지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나 국제경쟁력이 있는 금융사, 명품 은행이 자본금과 자산 규모로만 붙을 리는 없다.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서비스 능력일 터이고 근본적으로는 그것을 배우고 익혀 실현할 ‘사람’일 게다. 그동안 금융업의 경쟁력을 기른다는 명분하에 혹여 사람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서울파이낸스 주필 <빠르고 깊이 있는 금융경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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