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민영화 경쟁의 끝
[홍승희 칼럼] 민영화 경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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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 실험은 과학자들의 연구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이어져왔다. 20세기 초까지는 주로 정치적 실험이 이루어졌다면 20세기 후반부터는 경제적 실험이 주류가 된 듯하다. 현재에도 여전히 정치적 실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결론에 다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경제적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대세로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다만 그 자본주의 내에서도 저마다의 상황이 다르다보니 이런저런 학설이 도입되고 실험이 거듭되고 있다. 다소 엇갈리는 평가가 있기는 하나 미국이 대공황을 뉴딜정책을 통해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역시 상당한 경제적 실험이었고 또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성공했다. 지금 일본은 현대통화이론의 극단적 실험무대로서 막판을 향해가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주창하며 개혁개방에 나섰던 중국의 실험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정치 우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공산당의 간여로 향후 행로를 좀 더 눈여겨봐야 여지가 남았다.

이러저러한 각종 경제이론이 나돌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를 휩쓰는 유행은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복지를 중시하던 유럽국가들 마저 민영화의 물결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공산주의의 등장 이후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보전을 위해 수정자본주의로 궤도 수정을 했고 그 결과 완전한 경쟁우위를 확보했고 끝내 승리했다. 이 같은 승리에 도취해서인지 자본주의 종주국들은 자본주의의 수명을 연장시켜준 수정주의 노선을 버리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리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양상의 대표적 사례가 기간산업의 민영화 확산이었다.

사회복지에 높은 비중을 뒀던 유럽 여러 나라에서 조차 신자유주의의 실험이 확대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지수는 높아졌지만 각국이 이 흐름에 편승한 이유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회피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름이 이번 C19사태와 같은 대규모 재앙 앞에서 심각한 문제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의료보험이 민영화된 미국에선 환자들이 적기에 병원진료를 못받고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고 전력 민영화를 한 일본에서는 지역별 분할된 전력기업들 간에 표준조차 세워지지 않아 소통에 문제가 발생한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이나 유럽 각국이 전염병 확산에 속수무책이었던 이유의 하나가 말은 ‘개인의 자유’를 내세운 시민들의 저항이었지만 실상은 산업활동 위축으로 인해 여지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이들이 내보이는 불안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각국 정부가 서둘러 봉쇄를 풀고 경제활동을 재개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번 사태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엄청나기는 하다. 미국은 대공황 이래 최대의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하고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최대 추락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선방하고 있다는 한국마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며 자영업자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상황이니 한국보다 몇 배의 성장률 추락을 보이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 극도의 불안감이 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노동유연성이라는 포장 아래 손쉽게 해고가 이루어지는 사회시스템 아래서 노동자들의 불만은 손쉽게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나라들 가운데서도 과감할 정도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시키는데 앞장섰던 일본은 또 좀 독특하다. 하다못해 재난지원금 지급조차 기업 하청을 주는 상황임에도 국민들이 불편을 감내하는 데 특화된 것처럼 보이는 일본이다. 정부는 허둥대기만 할 뿐 사태 수습에 잇단 실기, 실수를 하고 있어도 눈에 띄는 국민적 저항은 없다.

이런 국민적 무기력 증상의 바탕에는 기간산업 민영화와 비정규직 노동의 보편화로 인한 체념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해 초 근 40년 만에 본 도쿄의 분위기는 마치 생기 빨린 좀비들의 집단 같았다. 민영화한 지하철은 40년 전보다 오히려 낙후돼 보였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생기를 느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번 C19사태에서나 지난여름의 큰 홍수 때에나 규정에 사로잡혀 합리적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 또한 사회적 역동성이 삭아 없어져서 생긴 폐해인 듯하다. 사회적 성장의 주체는 기업이든 노동자든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생기를 잃으면 사회 전반이 움직일 힘을 잃는 것 또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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