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빠른 배송, 느린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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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장성윤 기자] "서비스를 산 거지 노예를 산 것이 아니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가 택배 차량의 지상 운행을 막아 난데없는 '택배 소동'이 일었다. 택배기사들은 아파트 입구에 차량을 대고 손수레를 끌고 각 세대에 택배상자를 직접 전달하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배송시간이 늘어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누리꾼들은 "서비스를 산 거지 노예를 산 것이 아니다", "명백한 갑질"이라며 관련 아파트 측의 처사를 강력히 비난했다.

택배기사가 업무 환경을 존중받지 못한 것은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전국택배노동조합에 따르면 최근 200여명의 택배노동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는 아파트는 전국 100곳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택배기사들을 향한 소비자들의 '불편함'은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택배기사 위장 범죄의 영향도 크다.  최근 발생한 '노원구 세모녀 살인' 사건의 용의자도 택배기사로 위장해 피해자의 집에 들어가 범죄를 저질렀다.

코로나19로 비대면 배송 서비스가 확산했지만 귀중품이나 착불 배송인 경우 택배기사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 그럴때면 택배기사는 엘리베이터, 아파트 복도 등의 공간에서 물건을 나르면서 경계심 어린 아파트 주민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반면 소비자들과 기업들에겐 택배기사들의 역할이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쿠팡의 로켓배송, 마켓컬리의 샛별배송 등이 비대면 쇼핑에 빠진 소비자들에게 주목받으면서 유통 대기업들도 하나둘씩 새벽배송·당일배송 서비스를 선보였다. 실제로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주요 대형마트 3사 모두 온라인 주문 시 당일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택배기사들의 업무 환경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대형마트 새벽배송기사들은 밤 11시부터 나가서 물건을 싣고 새벽 6시까지 배송을 마쳐야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해진 시간 내에 배송하려면 교통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고 과속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소연 한다. 새벽에 차량통행이 적다는 이유로 먼 거리까지 배송을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도한 업무량을 떠안은 택배기사들의 사건 사고도 그만큼 늘고 있다. 작년에만 택배기사 16명이 숨졌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택배기사 4명이 숨졌고 5명이 뇌출혈 등으로 쓰러졌다. 

정부와 택배회사는 오는 7월부터 택배기사의 산업재해보험 가입이 의무화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업무 환경 개선 없이 산재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보험'에 불과하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더구나 이번 산재보험 가입 대상에 대형마트 온라인 배송기사들은 제외됐다. 개인사업자라는 이유에서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시대가 앞당겨 닥쳐오면서 우리는 집에서 더 편리하고 빠르게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택배기사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고 제자리 걸음이다. 택배기사가 충분한 휴식 시간을 확보하고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업무 환경 개선에 대한 고민과 노력도 커진 편리함 만큼이나 절실하고 중요한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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