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인간의 가치는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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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국 손해사정사
최보국 손해사정사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법정에서 대법관님께서 필자를 포함한 전문가 위원에게 "인간이 오래 일하는 것이 행복할까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육체노동자의 가동연령을 기존의 만 60세에서 만 65세로 상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앞두고 열린 공개변론 중 출석한 전문가에게 한 질문입니다.

지난 30년간 육체노동자는 일할 수 있는 나이, 즉 일을 하여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나이를 만 60세로 인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 60세를 넘어서는 육체노동자는 노동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더라도 사고 이후에는 위자료와 적극적 손해를 제외하고 향후 벌어들이지 못하는 손해인 소극적 손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법적 견해를 현실에 맞게 개선하고자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지금까지의 기조를 변경했습니다. 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 변경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경제생활을 하다가 다치거나 죽더라도 만 65세까지의 경제적 수입을 인정받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부상이나 사망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과거기준인 기대여명과 육체적 건강을 기초로 평가했던 것에서 탈피하여 현실에 맞게 변경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을 5년 연장하여 금전 배상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 타당할 지 문제입니다. 손해사정사인 필자는 지금까지 13년이 넘도록 손해배상에 관한 일을 하면서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경우에 법적 기준인 위자료, 치료비, 일실 소득 등을 기준으로 손해배상 금액을 정했습니다. 만 67세의 근로자가 열심히 일을 하며 경제 활동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중상해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에 손해는 위자료 및 적극손해로 배상을 받게 됩니다. 이 경우에 소극적 손해인 노동으로 인한 손해는 인정받지 못하고 위자료인 6000만원에서 1억원의 금액 내에서 배상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앞서 말한 가동연령의 연장은 만 65세의 경우에만 일실소득과 연결돼 금액이 정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죽거나 다친 경우에 본인이나 남은 가족의 슬픔의 가치는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을까요? 현재는 근로자가 근로 현장에서 일하다 죽는 경우에 근로자재해보험에서는 관행적으로 위자료의 최고 금액은 6000만원으로 정해집니다. 법적으로는 1억원의 위자료 금액이 권고되나 실무적으로 6000만원을 배상금액으로 정하게 됩니다. 또한, 교통사고나 일반 사고의 경우에는 사망자에 나이, 직업, 소득을 따져 위자료의 금액은 서울의 반지하 전세값 보다도 적은 최대 1억원을 인정하게 됩니다. 즉, 죽음으로 인한 슬픔의 가치는 최대 1억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자 혹은 가해자에게 책임에 상응하는 손해를 배상받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 1억 원 이하의 위자료 기준이 적정한지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종종 외신을 통해 듣는 외국사례의 경우에 위자료 금액의 차이로 손해배상액이 천문학적인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손해배상을 받을 때의 배상기준은 정형화된 수치에 따른 위자료, 치료비인 적극적 손해 및 소극적 손해 등으로 결정됩니다. 즉, 사고를 당한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혹은 연봉이 얼마였는지에 따라 일실소득인 향후 벌어들이지 못하는 손해로 인해 배상 받는 총액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이에 대한 각각의 일실소득의 차이로 인한 손해배상의 금액의 차이는 일견 수긍이 될 수 있을 지라도, 슬픔의 가치인 위자료의 경우에 근로자의 죽음, 70세의 노인의 죽음, 고관대작의 죽음의 슬픔의 차이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귀하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는 우주보다 귀한 가치의 상실로 거대의 슬픔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사람에 따라, 직업에 따라, 나이에 따라 더 값비싼 슬픔이 되고, 누군가는 덜 비싼 슬픔이 되는 것이 현대의 일반적인 상식과 일치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운이 좋게 자애로운 판사를 만나게 된다면 개별 소송에서 판사의 결정에 따라 금액이 더 비싼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비싼 슬픔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이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 소송을 제기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마저도 소송을 제기 한다고 반드시 비싼 슬픔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수고스럽고 힘든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슬픔을 인정받기 위해 위자료의 금액을 현실에 맞게 상향 조정을 하고 근거를 마련해 보상담당자나 책임자에 따라 금액이 변동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슬픔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사고 이전에 수입에 따라 일실 소득의 손해배상의 금액은 다를지라도 위자료의 금액은 현실에 맞게 1억원보다 많은 금액으로 상향하고, 누구나 동일한 슬픔의 가치를 인정되는 세상을 기대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대법관님의 질문인 “과연 인간이 오래 일하는 것이 행복할까요?”에 대한 그 자리에서 하지 못했던 대답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서 모든 사람이 계급에 따라 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일을 하는 가상의 세상과는 다르게 현실의 우리나라에서는 ‘헌법 제 32조 제 1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갖는다’라고 하여 노동을 의무가 아닌 권리이며, 노동으로 인한 자기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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