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21세기 '시일야방성대곡'
[데스크 칼럼] 21세기 '시일야방성대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5일 오후, 햇볕은 따뜻했지만, 바람은 여전히 한기를 품고 있었다.

서울 남산 북쪽 끝자락, 옛 중앙정보부 본부(전 안기부, 현 서울유스호스텔) 옆엔 자그맣게 ‘일본위안부 기억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조선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 강제합병 조약을 맺은 ‘경술국치’의 현장인 통감관저가 있던 곳이다. 기억의 터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사회 각계 각층과 시민 2만 여명이 모금해 2016년 8월 만들어졌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둥근 반석에 쓰인 글귀가 여전히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지난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입장’을 발표했다. 정부 입장의 요지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확정판결 원고들에게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고, 현재 계류 중인 관련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에도 역시 판결금 등을 지급한다는 게 골자다.

한 마디로 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 등 일제 강점기 조선 징용자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킨 전범 기업들이 물어야 할 배상금을 한국 기업들이 대신 변상하는 ‘제3자 변제안’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포스코(옛 포항종합제철), 한국전력, KT(옛 한국통신)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총 5억 달러의 자금을 받은 국내 16개 기업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징용 피해자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우리 대법원이 일본 전범 기업들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것을 우리 정부가 스스로 뒤집는 초유의 헌정질서 부정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여전히 식민 과거사에 대해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고, 강제징용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배상 책임이 없다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대신 우리가 스스로 과거사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꼴이다.

이 어찌 가능한 일이며, 22만명이 넘는 강제징용 피해자(고인 포함)를 비롯해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짓인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또 한번 서럽게 외칠 수밖에 없다.

30년 가량 검사로 법을 다룬 윤석열 대통령이 늘 강조한 것이 ‘법치국가 확립’이었다. 그런데 그 공언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정권이 법 위에 있고, 국민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 아픈 역사를 사죄와 용서라는 진정한 화해로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반성하고 사죄할 뜻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스스로 면죄부를 쥐어주는 것이 한일 관계 정상화인가. 

가까운 일본과 화해와 협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화해란 진정한 사죄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진정한 사죄 없이 어거지로 만든 화해는 모래성처럼 쉬 무너질 뿐이다. 

지난 16일 일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후 윤 대통령은 “2018년 그동안 정부의 입장, 정부의 1965년 청구권 협정 해석과 다른 (대법원의) 판결이 선고됐다”며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일관된 태도와 (대법원) 판결을 조화롭게 해석해 제3자 변제 해법을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재단의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윤 대통령의 발언은 모든 과거사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일본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자, 반대로 그간 우리 정부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일본의 주장처럼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고 해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일본의 강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개인 피해자의 배상 문제까지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윤석열 정부가 조급하게 추진한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결국 일본 기시다 총리를 비롯해 일본 측의 진심어린 사죄 발언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

자국의 가까운 역사마저 부정하며 굴욕적 태도로 일본이 바라는 것을 모두 퍼주는 모습에 국민이 과연 이 나라의 대통령에 신뢰와 지지를 보낼까. 그렇게 얻은 약간의 경제적 이익에 국민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까. 

윤 대통령이 최근 일본과 관련해 보여준 일련의 모습은 마치 일본이 과거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의 식민 지배에 대한 열강의 승인을 얻고, 1910년 결국 조선을 손에 넣는 것과 비슷한 역사적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북핵 압박을 위해 한미일 군사와 경제 동맹이 반드시 필요한 미국 상황에서, 일본이 미국에 빠른 한일 외교 정상화를 윤석열 정부에 압박한 결과가 아닌가라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완벽한 외교적 패배다. 

자존심마저 포기하며 정상회담을 통해 얻은 건 과연 무엇인가? 반도체 3개 소재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 조치인가? 이미 3개 소재에 대한 국산화, 해외 다른 수입선 확보, 일본 소재 기업의 한국 공장 설립 등으로 수출규제 해제는 우리 기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허울뿐인 성과다.

한일 지소미아 회복으로 당장 북한이 핵 도발을 중지하겠다고 하는가? 되레 중국과의 외교에서 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국익이 우선이라는 정권의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기 짝이 없다. 

산업부장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