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한국회계기준원이 제시한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초안'을 놓고 경제계가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공개초안 수준으로는 공시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정확성, 완전성, 투명성, 일관성, 유용성 등 기본적 공시원칙을 담보할 수 없다고 성토한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4일 '합리적 지속가능성 공시를 위한 경제계 공동 세미나'를 열고 공개초안의 대폭적인 손질과 정부의 신중한 제도 추진을 촉구했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이 상대적으로 많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이고 다양한 규모의 기업들이 복잡한 B2B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어 공급망 전체의 일사불란한 정보공시 대응에 한계가 크다"며 "제도화 단계에서는 가급적 모든 상장회사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으로 많은 상장회사가 동참할 수 있는 시점을 택해 공시 로드맵을 확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제를 맡은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대학 교수는 상장회사 및 배출량 검증 전문가의 의견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공시기준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객관적 방법론도 제시하지 못해 기업들은 자체 활용보다 외부 컨설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회계기준원의 공개초안은 ISSB 기준서를 번역한 것에 불과해 국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 우리 기업의 경쟁력 보호를 달성할 수 없다"며 "이대로 공시 의무화가 추진되면 기업은 준비 과정에서의 불확실성과 과도한 비용, 공시 이후 무분별한 소송과 업무 비효율 등 악순환의 고리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패널토론에서는 정부와 관계기관이 보다 긴 호흡으로 지속가능성 공시 관련 제도 정비와 기반 조성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각국마다 정치·경제, 법제도가 상이한 상황에서 섣부른 제도 도입보다 국익 보호 관점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들은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정합성을 추종하며 국내 기업 현실을 무시하는 접근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며 "완성도가 떨어지고 산업계가 부담이 크다고 하는 기준에 정합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곽관훈 선문대 법·경찰학과 교수는 "법률을 통해 모든 기업에 일률적 기준을 적용하면 변화하는 지속가능경영 속성상 개별 기업의 특성과 상황에 맞는 공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며 "지속가능성 공시가 본래적 기능을 하려면 기업의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기업 선택에 대한 규제당국과 시장의 존중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은경 컨슈머워치 사무총장은 "지속가능성 공시를 법적 의무로 강제할 경우 기업들은 그 기준에 맞춰야 해 자칫 질 좋은 제품, 경제적인 서비스를 바라는 소비자의 후생이 저하될 수도 있다"며 "우선은 자율공시를 하고, 의무공시는 유럽과 미국의 시행착오를 검토한 후 도입해도 늦지 않다"고 밝혔다.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기업공시제도란 투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정보를 공시함으로써 투자자를 보호하고 투자 결정을 지원하는 제도"라며 "공개초안은 오히려 투자자의 비교가능성과 활용성을 떨어뜨리고, 기업규제 수단으로 작용될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손석호 경총 사회정책팀장은 "EU가 지속가능성 공시를 서두르는 것은 단순한 투자정보 제공 차원을 넘어 역내 이익보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국내 공시기준을 마련할 때는 국제 동향을 다양하게 참고하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국내 기업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총, 대한상의, 한경협은 이날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기에 앞서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초안에 대한 의견을 각각 회계기준원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