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꾼에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훈수꾼에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 홍승희
  • 승인 2004.02.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보운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급발진 급제동이라 할 수 있다. 핸들을 돌려도 너무 각도를 크게 줘 옆차선의 차들을 위협하기 쉽다. 섬세하게 미세조정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정책에서 이런 미숙함이 아직도 적잖이 발견된다. 최근 환율의 급격한 변화에도 이런 당국의 미숙한 조정 개입이 있지 않았느냐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주말 이틀 연속 환율이 급격히 오른 이유가 외환당국의 달러 대량매수에 있다는 주장이다.

실상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당시 한국경제의 상황은 경제 펀더멘털의 문제라기 보다 일시적 외환보유고 고갈이 결정적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진만큼 당국이 외환문제에 민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경제상황에 대한 당국의 개입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기저기 숱한 상채기를 남기기 마련이다. 마치 계곡을 흐르는 물살이 갑자기 거세지면 주변 경관을 파훼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때 금방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도록 강력 처방을 자주 하는데는 호들갑스러운 언론과 그런 언론을 등에 업고 훈수 두기에 맛들인 학계의 단골 논평가들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도무지 정책이 서서히 스며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 ‘정부는 뭐하고 있냐’고 다그쳐대니 차분하게 정책을 펴나가기가 만만치 않을 터이다.

그런 언론과 인기 코멘테이터들의 조급증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빨리빨리 증후군’과 무관할 수 없을 터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전문가 집단이라는 이들의 그런 독촉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대중들이야 다급하게 손에 잡히는 결과를 기대하더라도 전문가 집단이라면 하나의 정책이 결과를 만들어내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결과에 도달했을 때의 파장 정도는 예측하고 있어야 하련만 그런 노력의 흔적을 보기 어렵다.

그런 여건을 감안하고 보면 당국의 차분하지 못한 정책대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당국의 서투른 운전을 변호할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바둑을 두든 장기를 두든 옆에서 참견하는 훈수꾼에게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선택은 돌을 든 당사자가 하는 것이므로.

적어도 한 국가의 명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이라면 100년 앞까지는 몰라도 10년, 아니 최소한 1년 후의 상황까지는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인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도 아니면서 그런 호들갑에 부화뇌동해서는 곤란하다.

정치로부터의 중립을 요구하는 공무원들,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진실로 중립을 지키는 길은 바로 그런 외부 반응에 대한 의연함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의연함이 변화하는 상황을 외면하고 한번 내린 결정에 요지부동하는 고집불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부연하면 사족이 될 터이다.

정책당국이 정책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늘 지나놓고 보면 정책당국자들 스스로 정책의 권위를 훼손하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정책의 권위는 원려숙고(遠慮熟考)한 끝에 내놓은 정책을 흔들림없이 집행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일 터이다. 당장은 들끓는 여론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조금 버텨내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그 비난이 두려워 끌려 가다보면 결국은 엉뚱한 샛길로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정책당국에 남는다.

하기야 이제까지 언제 정책의 과오에 대해 특정한 누가 책임을 진 예도 별반 없으니 당국자들이 무책임하게 일처리한다고 훗날 그 개인들에게 별일이야 있을까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런 이들에게라면 굳이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다만 그래도 뭔가 소신껏 일하고 싶은 이들에게 당장의 비판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조심스러운 정책운행을 해나가라고 격려하고 싶을 뿐이다.

‘초보운전’ 딱지 붙인 차 곁에서 위협적인 난폭운전을 하는 철딱서니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맞대응 운전을 해서 좋을 건 전혀 없지 않은가.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