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의 추억
화폐개혁의 추억
  • 홍승희
  • 승인 200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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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개혁이라면 고액권을 새로 발행하거나 새로운 권종이 등장하는 것도 포함되는 모양이지만 통상 서민들이 말하기는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만을 화폐개혁이라 한다. 그런 개념상의 화폐개혁으로 지금의 화폐단위가 생긴 것은 1962년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63년 민정이양을 준비하면서 기득권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경제적 저항을 그 한번의 화폐개혁으로 어느만큼 초토화시켰던 것은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필자도 기억한다.
물론 어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통해 어렴풋이 느낀 것에 불과하지만 당시 10:1의 비율로 화폐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일반 국민들도 졸지에 자산가치도 1/10로 줄어든 것 같은 허망함을 가졌던 듯하다. 그런가 하면 제도금융권 밖을 떠돌던 돈들이 일단은 어떤 식으로든 제도금융권을 거쳐야 했기에 자유당 정권에서 부정축재했던 돈들이 누구네서 얼마나 쏟아져 나왔다더라 하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식 소문들도 무성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 경제정책의 수장인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국회에서 화폐단위 변경과 관련해 언급한 것을 놓고서는 웬일로 조용한가 싶어 좀 궁금하다. 웬만한 정책에 대해서라면 입에 게거품 물고 덤벼들던 언론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 발언 내용에 대해 의외로 잠잠하다. 국회에서 경제정책의 수장이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연구 검토단계를 지나 구체적인 검토의 초기 단계에 와 있다고 밝혔다면 그게 비록 3~5년 이후를 겨냥했다 하더라도 와글와글 떠들썩할 법 한데 그다지 뜨거운 반응이 나오지 않아 의아할 정도다.
화폐단위 변경에 대해 얼마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으로 반응하던 이 부총리가 정확히 어떤 전후 맥락을 갖고 그같은 발언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액권 발행을 하느니 장기적 계획 아래 화폐단위 변경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원론적 얘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또 묘한 것으로는 열린우리당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거론하면서 1000:1의 비율을 얘기한대로 이 부총리 또한 같은 의견을 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변경을 위한 공론화 시기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입장 선회의 속도로 보자면 머잖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도 있겠다 싶게 다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쨌든 대체적으로 조용히 반응하는 가운데 경제정책에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매체들은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내놓고 있다. 반대하는 근거로는 물가불안, 개인적으로는 자산 규모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의 심리적 정서적 불안 등을 든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현재의 경제상황이나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할 때 또다른 사회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끼워 넣는다. 한마디로 부자들의 감추어진 부의 실체가 드러나서 사회적 저항을 야기시키지는 않을까를 염려하는 뉘앙스다.
그러나 다른 염려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런 우려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노파심이지 싶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진 개인이라 해도 우리 원화를 현찰로 집안에 재워놓으면 얼마나 재워놓겠는가. 부자들이 달러를 집안 금고에 보관한다는 소문은 무성하니 혹시 달러라면 모를까.
실상 고액권 발행 요구만 해도 그렇다. 웬만한 거래는 이제 신용카드 결제가 보편적이다. 물론 법인 거래인 경우 신용카드 거래가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도 웬만하면 인터넷 뱅킹이나 폰 뱅킹 등 현금이 오고 갈 일 없이 거래된다.
아직은 자기앞 수표 발행으로 매년 낭비되는 금액이 만만치 않다고 하지만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현금 거래를 하는 관행들도 차츰 바뀌어 가야 하고 또 바뀌고 있지 않은가.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화폐단위 변경이 됐든 한나라당이 제안한 고액권 발행이 됐든 변화하는 추세를 감안해서 길게 보고 정책들을 내놨으면 싶다. 4~5년 걸려 준비하고 정책을 집행할 때 쯤이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해지는 낭비는 막아야 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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