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박지수 기자] 올해 초만 해도 기해년 '황금 돼지의 해'라며 소비심리 회복 기대감에 부풀었던 유통업계는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기해년 유통업계를 결산해본다.
◇유통공룡, 간판 CEO 교체···'패션 전문가' 요직 발탁
2020년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의 최고경영자(CEO)가 바뀐다. 특히 패션 전문가들이 새로 발탁돼 눈길을 끈다.
롯데그룹은 지난 19일 내년도 정기 임원 인사를 통해 50여개 계열사 임원 180여명을 물갈이했다. 롯데그룹의 유통 계열사 수장 격인 이원준 부회장이 물러나고 강희태 롯데백화점 대표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새로운 사업부문(BU)장으로 임명됐다.
백화점 사업부장은 황범석 롯데홈쇼핑 전무가 맡았다. 황 신임 사업부장은 롯데홈쇼핑 재직 시절 '라우렐'과 'LBL' 등 고급 자체 브랜드(PB)로 성과를 내며 실적을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신세계백화점도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차정호 대표를 새 수장으로 맞았다. 차 신임 대표는 삼성물산 출신으로 2017년부터 올해까지 신세계인터내셔날 수장을 맡아온 유통·패션 전문가다. 차 신임 대표는 신세계인터내셔날재직 당시 역대 최고 실적을 이끌어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2016년 대비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3.7%, 105.3% 늘었다.
현대백화점 역시 이동호 부회장과 박동운 사장이 물러나고 1960년대생인 김형종 한섬 대표이사를 새 대표이사(사장)로 내정했다. 김형종 사장은 2012년부터 올해까지 한섬 대표를 맡았다. 한섬은 현대백화점그룹이 인수한 2012년 약 5000억원의 매출을 내던 회사에서 지난해 1조300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며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꼽힌다.
◇최악 실적 대형마트···'최저가'로 돌파구 모색
이커머스(전자상거래)의 공세와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인해 올해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대형마트들은 온라인 쇼핑으로 발길을 돌린 소비자를 다시 오프라인으로 되돌리기 위해 '최저가'를 앞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업계 1위인 이마트는 지난 2분기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으며, 지난 3분기 롯데마트는 영업이익이 무려 61% 쪼그라들었다. 이에 대형마트 빅3로 꼽히는 업체들은 각각 '에브리데이 국민가격(이마트)', '통큰 한 달·극한 도전·온리프라이스(롯데마트)', '빅딜 가격·블랙버스터(홈플러스)' 등 할인행사를 앞세워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초저가 경쟁의 신호탄을 날린 것은 이마트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 "중간은 없다"며 "시장은 '초저가'와 '프리미엄' 두 형태만 남게 될 것이며, 아직 미지의 영역인 초저가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마트는 지난 8월1일 소비자 구매빈도가 높은 상품들을 선정한 뒤 대량매입이나 원가구조를 개선해 가격을 최대 60%가량 낮춘 에브리데이 국민가격을 선보였다. 한번 가격이 정해지면 바꾸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롯데마트(통큰 한 달·극한 도전·온리프라이스)와 홈플러스(빅딜가격·블랙버스터) 역시 최저가 할인행사로 맞불을 놓으며 출혈경쟁을 벌였다. 품목 역시 생수, 와인, 물티슈 등 다양해졌다.
◇ 황금알 낳던 시내면세점···'천덕꾸러기' 신세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서울 시내면세점에서 한화갤러리아와 두산이 결국 손을 떼기로 했다.
지난 9월30일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는 서울 여의도 63빌딩 내 '갤러리아면세점 63' 문을 닫았다. 앞서 한화갤러리아는 2015년 시내면세점 특허권을 따냈다. 애초 영업 기간은 내년 말까지였지만, 면허기간(5년)을 채우지 못하고 3년9개월 만에 반납했다.
한화갤러리아에 따르면, 타임월드 법인은 2016년 178억원의 손실을 낸 후 매년 적자를 거듭하다 지난 3년간 1000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다. 이에 한화갤러리아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2020년 말까지 사업 기간이 남았음에도 2019년 9월 면세점 영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두산 역시 지난 10월29일 이사회를 열어 서울 동대문 상권에서 운영해온 '두타면세점'의 특허권 반납을 결정했다. 두산은 2020년1월25일을 끝으로 두타면세점의 영업을 종료한다.
두산은 한화와 마찬가지로 지난 2015년 시내면세점 특허권을 따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올해 다시 적자가 예상되는 등 중장기적으로 수익성 개선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돼 특허권을 반납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백화점, 명품·리빙상품 강화
백화점들이 수십년간 이어졌던 매장 구성 공식을 깨고, 명품과 리빙 상품 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백화점의 얼굴이 패션과 화장품이었다면 최근에는 명품·리빙상품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 양극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는 점도 백화점이 명품·리빙상품을 강화하는 이유다.
롯데쇼핑의 올해 3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작년 동기 대비 56.0% 급감한 876억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롯데백화점만 유일하게 영업이익이 증가했다. 롯데백화점 3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8% 증가한 1040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명품 덕을 톡톡히 봤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1~9월까지 명품 매출이 지난해보다 약 24% 증가했다.
롯데백화점은 '백화점 1층 = 화장품 매장'이라는 공식을 깨고 명품 매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또한 영국 유명 생활용품 편집매장 '더 콘란샵'을 들여오는 등 프리미엄 리빙 시장 선점에도 나섰다. 또한 롯데백화점은 자체 리빙 편집 매장인 ‘살림샵’을 의식주 토털 큐레이션 매장 ‘시시호시(時時好時)’로 개편해 내년 상반기 중 선보일 방침이다.
신세계백화점도 명품 콘텐츠 강화에 힘쓰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큰 손으로 부상한 2030 세대 소비자를 겨냥해 귀빈(VIP)자격 조건을 '연간 400만원 구매'로 낮추기도 했다. 최근 명품 등에 힘입어 단일매장 기준 2조원 돌파가 예상되는 강남점 1층에는 전 세계 럭셔리 브랜드들이 이색적인 콘셉트와 함께 다양한 상품을 한데 모아 소개하는 '더 스테이지'를 선보였다. 신세계백화점은 영등포점 B관의 2∼6층 5개층을 모두 생활전문관으로 새단장하기도 했다.
현대백화점 역시 올해 8월 판교점에 럭셔리 리빙관을 열어 리빙관에는 이탈리아 ‘까시나’, 프랑스 ‘리네로제’, 네덜란드 ‘모오이’ 등 세계 정상급 가구 브랜드를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등 리빙상품 강화에 나섰다.
◇너도나도 '새벽배송'···몸집 커지자 과열 경쟁
2015년 온라인 쇼핑몰 마켓컬리가 국내 최초로 '새벽배송'을 선보이자 쿠팡,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그룹 등 온·오프라인 대형 유통업체들이 모두 새벽배송 시장에 뛰어들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새벽배송 시장은 2015년 100억원에서 지난해 4000억원 규모로 커졌다. 올해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새벽배송은 국내 온라인 쇼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과거에는 신선식품을 온라인으로 사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배송이 도입되며 신선식품의 판매가 활성화됐다. 지난해 이커머스를 통해 거래된 신선식품은 약 13조5000억원으로 대형마트에서 팔리는 신선식품 규모(16조4000억원)를 넘어섰다.
◇불황 모르는 편의점···업계 빅3 '지각변동'
백화점, 대형마트 등 기존 유통업체들이 사상 최악의 실적을 받아든 가운데 1~2인 가구 증가 등의 영향으로 편의점은 오프라인 유통 중 대세로 떠올랐다.
산업부의 '2019년 10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 발표에 따르면 오프라인 유통업체 매출실적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1.1% 줄었다. 대형마트, 백화점, SSM(대형 슈퍼마켓)이 각각 4.8%, 3%, 1.3% 줄어든 반면 유일하게 편의점만 매출이 5.4% 늘었다.
특히 편의점업계 빅3의 지각변동이 눈길을 끈다. 업계 1위를 두고 CU와 GS25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2002년 CU가 점포 수 1위로 올라선 이래 17년간 2위에 머물렀던 GS25가 11월 말 기준 1만 3899개의 점포수를 기록하며 선두로 올라서면서다. CU의 점포수는 1만 3820개였다. 세븐일레븐도 11월 1만 5개의 점포 수를 달성하면서 CU, GS25에 이어 빅3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