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김호성 기자] 미국 달러화, 금과 함께 대표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일본 엔화의 가치가 연일 하락세다. 지난주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6년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엔·달러 환율이 장중 125엔을 넘긴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30일 달러·엔 환율은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이 진전을 보인다는 기대와 국제유가 하락으로 엔 매수, 달러 매도가 선행하면서 1달러당 122엔대 후반으로 오르며 소폭 반등세다. 이날 오전 8시 30분 기준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환율은 1달러당 122.98~123.00엔으로 전일 오후 5시 대비 0.59엔 상승했다.
통상적으로 엔화는 위기 상황에서 가치가 올라 원화와는 반대 방향의 흐름을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이후로는 원화와 함께 가치가 곤두박칠치는 모습이다. 엔화가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평가받아온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 현상이다.
이같은 엔화약세의 원인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 차별화, 고유가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 전망 등이 꼽힌다. 특히 미국과 반대로 가는 일본의 통화정책이 주요인으로 지목된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에 돌입한 반면, 일본 중앙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마이너스 금리를 지속하는 등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고물가 상황에서도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0%대에 머무르고 있어, 금리를 올릴 수 없다는 게 일본은행의 입장이다.
최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엔화 약세가 일본 경제에 긍정적이라는 견해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엔화 약세로 일본 수출기업들의 해외 수익이 늘면서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될 것이란 견해다.
이같은 일본은행의 엔약세 정책은 엔캐리트레이드를 부추기고 있다. 캐리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통화로 자금을 조달해 금리가 높은 나라의 금융상품 등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거래를 의미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8일 기준 미국과 일본의 국채 10년물 금리 격차는 2.13%로, 2019년 이후 가장 컸다. 미·일 금리차가 확대되면 글로벌 자산은 높은 금리를 주는 미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에 엔화를 팔고 달러화를 매입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한 것이다
금리차를 활용한 엔캐리트레이드가 활성화되면서 외환시장에서 엔화 매도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증권가는 이같은 엔화 약세 흐름이 당분간 이어지면서 달러·엔 환율이 135달러 위로 치솟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등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이 치열한 업종을 중심으로 수출 경쟁력 악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키움증권은 엔화가 달러당 123엔까지 오르며 약세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당분간 달러 대비 엔화의 약세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키움증권 리서치센터는 30일 보고서에서 “미국과 일본 통화정책 차별화 지속에 따른 미일 금리차 확대와 경상수지 적자가 엔화 약세의 배경”이라면서 “2012년과 2014년 당시 엔화의 약세폭 평균을 고려할 때 올해 달러·엔 환율은 135~140엔까지 추가 약세는 가능해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특히 국내 철강업계는 일본과의 가격 경쟁 뿐 아니라 미국의 철강 규제까지 맞물려 이중고가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은 2018년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해 수입 철강에 25%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당시 한국은 관세 부과 대신 2015~2017년 연평균 대미 철강 수출 물량의 70%로 제한하는 쿼터 방식을 받아들였는데, 이와 관련한 재협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대형증권사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지정학적 위험과 선진국 긴축 가속화 등으로 불확실한 경제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원화 역시 엔화와 마찬가지로 당분간 강세 전환이 어렵다"며 "대외 경기 불확실성으로 정부와 민간 차원의 투자 집행이 지연되는 점 역시 철강, 기계 등 업종의 피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분석했다.
토요타, 혼다, 닛산, 마쓰다, 스바루 등 일본 완성차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국내 완성차 업계의 수출 경쟁력도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 한국 완성차 제조사들은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2010년대 초중반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이 80엔대에서 120엔대로 치솟으면서 완성차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은바 있다. 도요타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엔 하락할 경우 영업이익이 연간 400억엔 가량 증가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2차전지, FPCB(연성인쇄회로기판), 반도체 소재 등 이른바 '소부장' 업종에도 타격이 우려된다.
이들 업종에서는 일본의 니토덴코(스마트폰용 광학필름), 교세라(파인세라믹), 무라타제작소(콘덴서·세라믹필터) 등 일본의 강소기업과 경쟁하는 국내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최근 몇년간 한일간 외교갈등이 커지면서 국내 소부장 업체들은 일본 제품과 경쟁하며 부품 소재 분야의 국산화에 속도를 높여왔다. 엔저 흐름에 부딪히면서 국산화 속도가 더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조선, 통신기기, 일반기계 등의 업종은 오히려 엔화 가치 하락에 따라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조선, 일반기계 업종의 경우 핵심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엔저에 따른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