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K금융, 13일 롱리스트 확정···올드보이 귀환?
우리 회장, 입지 좁아져···KB금융그룹 새대교체?
[서울파이낸스 김현경 기자] 연임이 유력했던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들이 잇달아 낙마하면서, 정부의 인사개입 논란이 커지고 있다. 우리금융, KB금융 등 내년 수장 임기만료를 앞둔 금융지주사들이 느낄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2일 NH농협금융 차기 회장에 현 정부와 가까운 이석준(63) 전 국무조정실장이 내정됐다. 이 내정자는 새 정부 이후 처음으로 선임된 관료 출신 금융사 CEO다.
이 내정자는 제26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발을 들인 후 재정경제부 증권제도과장, 기획예산처 행정재정기획단장, 기획재정부 행정예산심의관·경제예산심의관·정책조정국장 등을 맡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엔 기획재정부 제2차관, 미래창조과학부 제1차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맡았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 대선캠프에 참여했으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특별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현 정부와 가까운 인사로 분류된다.
이 내정자의 등장으로 업계에서는 금융회사 수장 인사를 두고 낙하산과 외풍이 현실화됐다는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이 내정자가 경제 전반에 대한 탁월한 기획 역량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나 금융 관련 경력이 비교적 많지 않다는 점에서다.
특히, 애초 연임 가능성이 높았던 손병환(60) 현 회장을 밀어내고 이 내정자가 급부상한 것도 이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손 회장의 경우 재임기간 동안 농협금융의 실적을 4대 금융지주와 견줄 정도로 크게 성장시킨 데다 첫 내부 출신 회장으로서 상징성이 컸던 만큼 연임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농협금융지주는 농협중앙회의 입김으로 움직이는 조직인데, 중앙회가 현 정부와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원했던 것으로 안다"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정부도 농협도 서로 윈윈(win-win) 했다고 느낄 만한 결과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인사 외풍에 우려를 표하는 까닭은 농협금융에 앞서 진행된 신한금융 회장 선임 과정에서도 수장 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앞서 신한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8일 진옥동(61) 신한은행장을 차기 신한금융 회장으로 '깜짝' 발탁했다.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3연임이 유력했던 조용병(65) 회장이 면접 과정에서 갑작스런 용퇴를 결정하면서 진 행장이 바통을 이어받게 됐다.
조 회장은 용퇴 이유로 사모펀드 사태 책임과 세대교체를 들었지만, '외풍' 때문일 것이란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전 정부에서 선임됐거나 연임한 금융사 CEO의 임기연장에 대해 금융당국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14일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을 소집한 간담회에서 "CEO 선임이 합리적인 경영승계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얼핏 원론적인 발언으로 보이지만, 금융당국 수장이 CEO선임을 언급한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게 금융권 안팎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이처럼 연임이 점쳐졌던 금융그룹 CEO가 낙마하면서 CEO 임기만료를 앞둔 금융그룹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BNK금융이 회장 선임을 진행하고 있고, 우리금융·KB금융 등은 내년 수장 임기만료를 앞두고 있다.
BNK금융의 경우 이날 차기 회장 1차 후보군(롱리스트)으로 내부 후보 9명과 외부 후보 9명 등 총 18명을 확정했다. 이 중 후보군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활동했던 올드보이 이팔성(78) 전 우리금융 회장과 김창록(73) 전 산업은행 총재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발(發) 낙하산 인사 논란은 거세지는 모양새다.
연임에 도전하는 손태승(63) 우리금융 회장의 입지도 상당히 좁아졌다는 평가다. 손 회장이 재임기간 동안 사모펀드 손실 사태, 대규모 횡령, 이상외환송금 등 각종 금융사고에 휘말렸던 탓에 금융당국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 지분을 대규모 정리하며 지난해 민영화에 성공한 우리금융이지만 남은 정부 지분 1.29%는 여전히 외부 개입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금융노조는 지난 12일 성명서를 통해 "완전 민영화를 이룬 우리금융의 제 1대 주주는 대다수 임직원이 참여하고 있는 우리사주조합"이라며 "이러한 우리금융의 CEO 선임에 관치가 작용한다면 이는 현 정부가 내세운 국정의 대원칙인 '법치'나 '시장자유주의 원칙'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것으로 누워서 침 뱉는 꼴"이라고 힐난했다.
KB금융의 경우 윤종규(67) 회장의 임기가 내년 11월 말까지로 아직 여유가 있지만 새 정부 들어 강해지고 있는 인사 외풍 기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리딩뱅크 '맞수' 신한금융이 세대교체 속도를 높이면서 올해 말 예정된 KB금융 계열사 인사에서 상당한 규모의 변화를 줘야 하지 않겠냐는 압박이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관료 출신과 내부 출신 행장 선임을 두고 진통을 앓아온 국책은행 IBK기업은행도 윤종원(62) 행장의 임기가 내년 1월 2일 종료됨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이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정은보 전 금융감독원장과 이찬우 전 금감원 수석부원장, 도규상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관료 출신이 대거 거론되면서 이번 인사에서도 '관치'를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 금융회사의 금리조정 권한에 제동을 가하는 등 관치 수위를 높여왔던 정부가 민간 금융회사 수장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자 업계에서는 새 정부가 금융권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금융사 CEO들은 채용비리, 사모펀드 손실 등 각종 사건·사고에 대해 책임을 미루거나 당국 제재에 불복하는 등 정부와 대척하는 분위기를 형성해왔다.
특히 현 정부 입장에선 '고금리' '고물가' 등 복합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시장개입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가계부채 부실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금리에 당국이 적극 관여, 예대마진 공시 제도 등을 손 본데 이어 '돈맥경화' 탓에 자금이 은행에 쏠리자 지난달 '수신금리 과당경쟁'을 자제하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정부가 관치 가능성에 선을 그으면서도 장기집권 CEO들에 대한 교체 의중을 은근히 내비쳤던 것도 이런 연속선상이다. 새 정부 출범을 빌미로 당국이 이번 금융그룹 회장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금융사를 길들이려는 기조가 강해졌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지주사는 엄연히 민간 기업이지만 금융당국의 보수적인 관리 아래 놓여있는 만큼 관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며 "특히 지난 정권에서 금융지주 회장들이 당국 제재에 연이어 행정소송을 걸면서 당국에 맞섰던 터라, 당국이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금융회사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