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최근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을 적용한 첫 기업 소유주(오너) 기소에 이어 원청 대표의 책임을 묻는 첫 선고가 내려지자 건설업계에 '최고경영자(CEO) 사법리스크'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관련 법상 처벌 대상인 '경영책임자' 규정에 대비해 건설사들이 부랴부랴 '월급 사장'이나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를 방패막이로 내세웠지만 이 같은 노력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 건립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노동자 추락 사고와 관련 원청사 대표·원청 법인과 안전관리자가 유죄를 선고받았다. 지난 6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형사4단독은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온유파트너스에 벌금 3000만원을, 회사 대표 A씨에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안전관리자인 현장소장에도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앞서 지난달 31일에는 삼표그룹과 정도원 회장이 삼표산업의 경기 양주 채석장 붕괴 사고 관련, 법 위반 혐의를 받아 불구속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종신 대표이사 등 임직원 6명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됐다. 삼표산업이 작년 1월 CSO를 선임한 이후에도 '실질적·최종적으로' 안전보건 업무를 보고받고 결정한 것은 삼표산업 대표나 CSO가 아닌 정 회장이라고 검찰은 판단한 것이다.
이 가운데 건설업계 우려도 커지고 있다. 검찰이 사고 발생 기업 대표가 아닌 그룹 오너를 법 적용 대상으로 지목한 데다 재판부도 하청업체 사고에 대해 원청사와 원청 대표의 책임을 무겁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 1월 중대재해법 시행을 전후로 CSO 선임, 관련 조직을 신설·확대해 온 건설사들도 영향권에 놓이게 됐다. 실제 국내 주요 10대 건설사들은 법 시행을 전후로 CSO직을 잇달아 신설했다. 중대재해법상 경영책임자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중대재해법 책임자를 별도로 지정하기 위해서다.
삼성물산은 안병철 부사장이 CSO를 맡아 전사적인 안전·보건 정책 수립부터 이행까지 전담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인사·예산·평가 권한을 갖고 있다. 현대건설은 황준하 안전관리본부장 겸 CSO, GS건설은 우무현 지속가능경영부문 대표(사장) 겸 CSO를 별도로 둔 상태다. 대우건설도 작년 초 현대건설 품질관리실장 출신이자 중흥그룹을 거친 민준기 CSO 겸 안전품질본부장(전무)를 발탁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정익희 대표이사에게 CSO를 맡겼다. GS건설 등 7곳이 내부 또는 외부에서 새로 발탁했고, DL이앤씨 등 3곳은 기존 임원급 인사가 그대로 CSO를 겸직하고 있다.
이를 두고 당초 업계 안팎에서는 중대재해 발생 시 대표이사 대신 처벌받을 일종의 '방패'로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었다. 그러나 이번 재판부 판결과 검찰 기소 등 사례로 중대재해법상 CEO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비해 CSO 선임에 나섰던 건설사들의 움직임이 사실상 무력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례가 향후 다른 사건 판결에 미칠 영향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중대재해 사건은 총 51건이며, 삼표산업의 사고를 포함해 14건이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모두 대표이사나 그룹 총수가 경영책임자로 지목되면서 'CEO 재판'이 줄 이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또 기소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DL이앤씨·현대산업개발 등 기업 수사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 해당 업체들은 "향후 사법절차에 성실하게 임할 것"이라며 "사업장 현장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앞으로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CSO 선임 등 책임을 회피하려던 건설사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권영국 해우법률사무소 변호사(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는 "(정 회장 기소는) 경영책임자 정의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실질적·최종적인 권한을 가지고 행사한 자에게 죄책을 물음으로써 월급 사장이나 안전보건책임자(CSO)를 내세워 법망에서 벗어나려던 시도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건설업계에서는 실질적인 예방보다는 CEO 처벌 중심으로 경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해당 법 개정이 조속 추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형건설사 한 관계자는 "건설사의 경우 수십, 수백개의 현장이 있는데 기업 CEO나 오너 1명이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 관리한다는 게 현실성이 떨어지고 이 중 어느 한 곳에서 사고가 났다고 모든 책임을 CEO에게 묻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의문스럽다"면서 "당연히 안전 관련 시스템을 강화하고 투자를 많이 하는 게 맞지만 지금의 법은 방향성이 시스템 강화나 예방에 맞춰지기보다는 처벌에 집중됐다는 점에서 아쉽다"고 말했다.
한편, 건설업계를 비롯해 경영계의 촉구에 따라 정부는 지난 1월 '중대재해처벌법 개선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하고 오는 6월까지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