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이도경 기자] 정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5조원 이상 삭감하기로 해 이에 따른 후폭풍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내년도 정부 R&D 예산은 25조9000억원으로 올해 대비 5조2000억원(16.6%) 줄었다. IMF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줄지 않던 R&D 예산이 지난 1990년 이후 약 33년 만에 삭감된 것이다.
이 중 가장 큰 이슈를 불러온 것은 과학기술의 뿌리라 불리는 기초과학 R&D 예산을 2000억원 가량 삭감한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계속 과제마저 올해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만든 한우물 파기 사업을 제외하면 최대 40%까지 감액됐다.
기초과학 분야 교수들과 연구진 반발에 정부는 뒤늦게 과학자 인건비와 대학 기초연구 지원 예산 등을 우선 복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국가 R&D 삭감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박원주 의원은 이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12대 국가전략기술 관련 R&D 사업 198개의 내년도 정부 예산(5148억원)이 올해 대비 18.6%(174억원) 감소했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가 지난해 10월 국가전략기술로 선정한 12개 분야 중에서 삭감을 피한 곳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공약으로 내세운 차세대 원자력 분야 뿐이다. 한국 경제의 주축이 되는 반도체·디스플레이뿐 아니라 글로벌 패권 다툼의 한 가운데 놓인 인공지능(AI)과 차세대 통신 분야마저 예산 삭감을 피하지 못했다.
이처럼 R&D 예산 삭감 기조에 여당인 국민의힘은 과학연구계의 '이권 카르텔'로 인한 비효율과 낭비 요인이 생겼고, 기술 패권 경쟁과 글로벌 구조 전환에 맞춰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적 예산 배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 대통령 역시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언급되는 '이권 카르텔'의 정체가 모호한 것은 둘째 치고, 선택과 집중을 위해 R&D 예산을 줄인다는 계획 자체도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결과를 추구하는 것은 민간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다. 정부는 당장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끈기 있게 국가 전체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R&D를 고민해야 한다.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초과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기술 발전의 초석이 되는 R&D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이에 대한 부담을 민간에 떠넘기겠다는 말과 같다. 응용 산업만을 추구하다가는 글로벌 기업에 대한 기술 종속을 피할 수 없다.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에 지은 누각이 튼튼할 리 없다. 기초 기술을 확보하지 않으면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것은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개발자들의 꿈과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응용 산업이 꽃 피고 자생할 수 있도록 기초과학 R&D를 지원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