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난해한 육성과 콘텐츠···엔씨, 이제는 방향성 되찾아야
[서울파이낸스 이도경 기자] '박제가 돼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다. 기자는 지난 28일 엔씨소프트의 신작 '호연'의 출시 후, 현재의 엔씨소프트를 보면서 문득 이 구절이 머리를 스쳤다. '리니지' 시리즈로 국내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엔씨가 이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조롱거리로 '박제'돼 버린 모습을 보면 사뭇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엔씨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해 '쓰론 앤 리버티(TL)'를 기점으로 그간 '업보'로 지적받았던 맹독성 BM(사업 모델)을 과감히 덜어내고, 난투형 대전 액션 '배틀 크러쉬' 등 새로운 포트폴리오 발굴에도 적극 나섰다. 또 박병무 신임 공동대표를 선임하고 체제 변환에 나서는 등 변화의 '진정성'을 어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다만 첫 술에 어찌 배부를 수 있으랴. 야심차게 준비한 'TL'은 엔씨가 그간의 모습을 되돌아 본 반성문이자 출사표였지만, 이미 떠나버린 게이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6월 출시된 '배틀 크러쉬' 역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량화된 BM을 유지하면서 성장 과정의 콘텐츠 공백이 심각했던 'TL'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엔씨의 신작을 조롱하는 것이 콘텐츠로 자리잡은 상황에, 'TL'과 '배틀 크러쉬'는 비록 느릴 지언정 올바른 방향을 가고 있단 희망적 시그널이었다.
같은 의미에서 엔씨의 신작 '호연'에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 지난해 지스타 행사에서도 '프로젝트 BBS(호연)'를 가장 먼저 시연했고, 짧은 체험에서 나름대로 기믹을 파훼하던 정통 RPG 게임의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정식 출시 후 만난 호연은 'TL'과 '배틀 크러쉬'가 세워 둔 이정표 앞에서 화려한 'U턴 드리프트'를 자랑했다.
◇ 서브컬처 탈 쓴 '리니지'의 귀환···스토리·캐릭터 매력은 어디에= 고기환 호연 개발총괄은 정식 출시 전 호연이 '서브컬처 게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많은 유저들은 카툰렌더링을 차용한 수집형 RPG가 서브컬처 게임이 아니란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고, 이들은 '젠레스 존 제로', '명조' 등 중국 유명 서브컬처 게임과의 비교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기자 역시 고 총괄의 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실제 플레이를 경험해 본 후에는 그 발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호연'이 카툰렌더링을 쓴 것 뿐인 '리니지' 계열의 모바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청량감 넘치는 색감과 나름의 매력을 가지는 캐릭터 디자인 등이 기대감을 높이지만, 이내 익숙하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숨막히는 UI(사용자 경험)와 '배지(알림 표시) 지우기'가 시작된다. 그리고는 금새 깨닫게 된다. 아, 정말로 서브컬처 게임이 아니구나.
서브컬처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매력적인 서사와 캐릭터 디자인 등으로 이용자의 수집욕을 자극하는 데 있다. 각 캐릭터 간 성능 격차가 없지는 않지만, 경쟁 요소를 없애거나 밸런스 유지를 위한 업데이트를 진행하는 등 수집 요인을 캐릭터 성능보다는 개인의 기호에 맞추는 경향이 짖다.
하지만 '호연'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스토리와 관계성은 매우 희미하다. 멸문 위기에 놓인 호연문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유설' 일행은 그 역할 배분이 애매하고(종종 이 게임의 주인공이 의뢰 제공 NPC '정복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핵심 조연마저 사연보다는 발생 사건 자체에만 집중해 캐릭터의 매력을 들여다 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비록 '강호록'을 통해 개별 스토리를 보여주긴 하지만 메인 스토리에 녹아들지 않는 플레이버 텍스트에 가깝다.
엔씨는 이러한 문제를 특정 캐릭터 조합을 완성하면 추가 성능을 제공하는 '인연 관리', '영웅 서고'등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심지어 뽑은 캐릭터의 '연쇄'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도 3~4명의 캐릭터를 추가로 뽑아야 한다. 캐릭터의 매력과 관계성이 부족하니 성능을 미끼로 이용자의 구매력을 이끌었고, 결국 리니지 시리즈의 '장비 도감'이 구현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호연'이 통상 서브컬쳐 게임이 취하는 싱글 플레이 RPG가 아닌, 다른 유저들과 함께 필드보스를 잡고 연합(길드)를 통해 교류하는 MMORPG라는 점이다. 엔씨 측은 이러한 특징이 다른 수집형 RPG와 가지는 차별점이라고 설명했지만, '수집형'과 'MMORPG'의 조합이 주는 명백한 단점을 차별점으로 승화할 수는 없다.
◇ 지나치게 난해한 육성과 콘텐츠···'과금 루트' 다변화?= 게임의 콘텐츠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단연 '필드 사냥'으로, 60여 종의 캐리터 중 5종의 캐릭터로 팀을 구성해 스킬과 능력치를 조합할 수 있다. 이동과 스킬 사용 등은 자동 진행이 가능하나, 적의 큰 공격을 끊는 '협력기'나 '회피' 버튼은 수동으로 조작해야 한다.
이는 이용자 편의성을 높이면서도 '손맛'을 높이고자 한 선택으로 해석되나 실제로는 자동 전투를 하자니 계속 조작을 해줘야 하고, 수동 전투를 하자니 지루하고 손맛이 떨어지는 결과물을 낳았다. 보스를 상대할 때는 기믹을 파훼하는 재미가 붙긴 하지만, 약점-협력기-회피의 반복이라 여전히 깊이가 깊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동 중 공격이 불가능한 점과 'TL'에서 훌륭한 호환성을 보여줬던 패드 지원도 되지 않는 점 역시 아쉬웠다.
이외에도 △턴제 전투 콘텐츠인 '심상 수련' △파티원을 파견해 재화를 얻는 '탐험' △보스를 사냥해 장비를 파밍하는 '네임드 보스' △하루 15분씩 던전에 들어가 장비와 금화를 얻는 '공개 던전' △SLG(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요소를 차용해 건물을 증축하는 '가문 관리' △턴제 PVP(유저 간 대결) '비무대전' 등의 콘텐츠가 존재하는데, 대부분은 동기를 부여하는 배경 스토리도, 즐길 거리도, 심지어는 일관성도 없이 단지 성장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숙제'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횟수 제한이 있으며, 추가로 도전하거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유료 재화를 사용해야 한다. 어쩌면 유료 재화 소모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콘텐츠를 잡아늘린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당근 라페마냥 잘게 쪼개진 육성 콘텐츠를 보면 의구심은 더욱 커지게 된다. 장비 및 성장 재화를 제공하는 온갖 전투 콘텐츠를 제외하더라도 △수호령(펫) △영웅 초월 △가문 특성 △점성술 △무공 비급 강화 △신수패 등 육성 요소가 지나치게 많다. 이는 유저의 과금 피로도를 높이고 난잡한 콘텐츠와 함께 게임의 전체적인 인상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 '나쁜 BM' 돌아온 엔씨···이제는 방향성 되찾아야= 이처럼 이번 '호연'은 'TL'과 '배틀 크러쉬'에서 보여준 엔씨의 변화 의지가 무색하게 온갖 '나쁜 BM'으로 되돌아왔다.
이는 뽑기 확률도 마찬가지인데, 1회 뽑기에서 '온전한 영웅'이 뽑힐 확률이 22.0%다. 나머지 78.0%는 여러 개를 모아 영웅 하나를 완성하는 '조각'으로 등장한다. 엔씨 모바일 게임에서 처음으로 '천장(일정 뽑기 횟수 달성 시 원하는 캐릭터를 보장하는 시스템)'이 도입됐지만, 특정 이벤트 기간동안 확률 보정을 받는 '한정 캐릭터'마저도 영웅 등장 확률이 0.09%, 조각 등장 확률이 0.49%라는 괴악한 수준을 자랑한다. 각종 인연·도감 시스템으로 캐릭터의 조합을 강제하면서 동시에 같은 캐릭터를 2번 이상 추가로 뽑아야 스킬이 해금되는 등, X축과 Y축 과금 모두를 유도하기 때문에 부담이 결코 적지 않다.
물론 게임의 장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과 색감, 전체적인 그래픽 등은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만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이폰 15 pro와 원활한 5G 환경을 기준으로 중간 옵션에서도 발열과 끊김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PC 버전을 기준으로는 플레이 경험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쩌면 늘어난 BM만큼 '호연'이 주춤하고 있는 엔씨의 하반기 실적을 되살려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같은 결과물이 맹독성 BM과 잦은 약속 번복으로 이용자 신뢰를 잃어버린 엔씨가 취할 방향이었는 지는 의문이 든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게임을 해보지 않았는데 별로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매번 "이번만큼은 바뀌겠다"라고 각오하지 않았나.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레퍼런스가 되는 게임들의 장점을 살릴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과금 루트만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점이다. 이용자 신뢰는 그렇게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TL'과 '배틀 크러쉬'가 외면받은 것은 모두 게임의 본질적 재미에 구멍이 났기 때문인데, 적어도 '호연'에서는 피드백을 반영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했다.
엔씨가 이번 '호연'에서 어떤 변화의 모습을 어필하고 싶었는 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소설 '날개'의 마지막 문단처럼 황망하게만 보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