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금융 관련 사고들은 신뢰도가 생명인 금융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인터넷 뱅킹, 폰뱅킹, CD기 사고 같은 은행 내부적 위험 외에 비록 용역을 주는 일이라고는 하나 현금수송차량이 심심찮게 털리는 일도 금융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테크니컬한 이런 문제 외에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금융자본의 성격을 둘러싼 논란도 아직 본격적인 논의구조가 구축되지 못했다. 여전히 정부와 재계로 입장이 나뉘어 대립하던 수준 이상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 2월말 출범할 새정부 인수위원회가 재벌계 금융사들의 계열분리를 거론, 잠자던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초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를 규제했던 것은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화할 가능성을 우려해서였다. 그리고 제2금융권에 대거 진출한 재벌그룹들은 그런 우려가 현실화한 모습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면서 논의는 새롭게 시작돼야 할 상황이 됐다. 자본력을 가진 국내 재벌들이 외국계 금융사들에 비해 차별을 받는 소위 역차별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논의를 시작할 시점에서 IMF사태가 터졌고 금융기관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면서 그 첫 타겟으로 재벌계 금융사들이 대두돼 진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재벌계 금융기관들의 부실화 정도가 평균보다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 새정부의 재벌계 금융사 계열분리에 맞추는 듯 대응하는 논리로 등장하고 있는게 금융그룹화다. 이미 주요 재벌그룹들은 은행을 제외한 각종 금융사들을 골고루 거느리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데 무리가 없는 형편이다.
만약 금융그룹화가 이루어지면 재벌들 입장에서는 그동안 진입이 금지됐던 은행권을 넘볼 수 있게 된다. 역차별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산업자본에서 이양된 소수 금융자본들이 금융시장을 독점할 가능성도 크다. 이미 삼성, LG, 현대, SK 등 국내 굴지의 재벌치고 금융사 몇 개 없는 곳은 없다. 특히 금융업종별 1위를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는 삼성의 경우 금융그룹으로 계열분리되면 더욱 기세등등해질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이제까지 산업자본이 금융계열사를 어떻게 활용해왔는지를 보면 은행을 산업자본에 개방하는 일이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만큼이나 불안하다. 금융그룹화가 대재벌들의 손에 또하나의 칼자루를 쥐어주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논리가 일순간에 금융자본의 산업지배로 뒤집어지는 계기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재벌들로서는 금융그룹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금없는 상속을 시도할 가능성도 높다. 특히 너무 젊은 자녀들에게 형식이야 어떻든 금융지주회사 기능을 하게될 1개 금융사 주식만 물려주면 그 금융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계열 금융사들을 전부 장악하게 될테고 금융사의 투자를 빙자해 계열 제조업체 지원을 노골적으로 하고 나설 가능성도 농후하다.
일부 대표적 재벌들은 벌써 금융사 계열분리를 요구하는 새정부 출범에 앞서 금융그룹화를 위한 초석을 놓고 있는 낌새다. 늘 관리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능력으로 이나라 경제를 지배해온 그들의 능력은 결코 녹록하게 볼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더욱이 2세들을 거의 해외유학파 MBA로 키워놨다. 금융그룹을 물려줘도 최소한 전문성 시비를 피할 준비까지 갖춰놓은 것이다. 외국자본과 싸워 이길 경쟁력이라는 논리적 무기도 만만한게 아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을까. 재벌시스템이 온존된 금융그룹화는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 금융그룹화 자체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세로 보이지만 산업자본 시절의 재벌시스템을 복제해 금융그룹으로 전화시키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그건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에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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