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계영배, 세상의 이치 
[데스크 칼럼] 계영배, 세상의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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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점심 먹을 때 자식들이 화제에 올랐다. 한 선배가 장성한 아들 둘한테 '적당히'를 주문한다고 말했다. 그는 적당하다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면서, 사회생활도 적당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적당히에 대해 '정도에 알맞게' 또는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게'라고 풀이한다. 정도에 알맞게는 일할 때 필요한 자세 중 하나다. 긍정적 의미인 셈이다. 반면 '요령'을 '잔꾀'라고 받아들인다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자식들이 잔꾀 피우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테니 두 아들한테 적당히를 주문한 선배는 무리하지 말고 정도에 알맞게 하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선배로부터 적당히란 말을 듣자 과유불급(過猶不及·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을 설명할 때 쓰이는 '계영배(戒盈杯)'가 떠올랐다. 계영배는 가득함(盈)을 경계(戒)하는 잔(杯)으로, 술이 일정 수위를 넘으면 새어나가도록 설계됐다.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 절주배(節酒杯)라고도 부른다. 

포털 사이트와 백과사전에서 확인해보니, 계영배엔 사이펀(siphon)의 원리가 담겨 있다. 사이펀이란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해 액체를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는 연통형 관을 일컫는다. 서양에도 계영배와 비슷한 '피타고라스의 컵'이 있는데,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고 한다. 

몇 년 전 같이 일하는 후배한테 계영배 얘기를 들려주면서 최인호가 지은 소설 '상도'(商道)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2000년 출판된 5권짜리 소설 '상도'를 읽으며 계영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 '상도'는 조선 후기 만상(灣商·평안북도 의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상인)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렸다. 중인(中人) 신분으로 태어난 임상옥은 국경지역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일군 인물이다. 그는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란 글귀가 새겨진 계영배를 스승에게 물려받고 장사의 도리를 깨닫는다. 

사환(使喚·상점의 말단 심부름꾼)부터 장사를 배워서 대방(大房·상단을 경영하는 총수) 자리까지 오른 임상옥은 번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 공으로 종3품 벼슬에 올랐으나 비변사의 논척을 받자 물러난 뒤, 빈민 구제와 채마밭 가꾸기로 여생을 보냈다. 임상옥의 호 가포(稼圃)는 '채마밭 가꾸는 사람'이란 뜻이다. 

곁에 둔 계영배를 보면서 과욕을 다스린 임상옥은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임상옥이 남겼다는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과 '상즉인'(商卽人·장사는 이익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이란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계영배는 과거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에서도 적지 않은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2월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열린 6자회담 당시 북한 수석대표였던 김계관이 핵 물질 신고 조건으로 한·미 합동군사 훈련 중단을 요구하자,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이 계영배를 내세워 큰 욕심을 부리면 아무 것도 건질 수 없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주현 생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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