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고종과 민비 시절의 거울
[홍승희 칼럼] 고종과 민비 시절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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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왕비였던 민비, 요즘은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실상 민비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에 시해 당했다. 사후 남편인 고종이 황제 등극을 하면서 황후로 추증된 경우이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전에는 그냥 왕비로서 민비로 부르는 게 정확하다.

일본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그에 대한 평가는 실상보다 상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실상 정치력이 부족했던 남편을 뒷전에 두고 정치·외교에 깊이 간여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사전학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의 처지에서 격변의 시대에 적절한 대응을 할 능력은 없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길고 길었던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로 허약할대로 허약해진 왕실을 지켜냄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던 민비는 자신의 영민함을 믿고 열강이 물고 뜯으려 달려드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줄타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런 외교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음에도 그의 선택에 나라나 백성은 없었다.

사적으로는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시대적 흐름을 빗겨간 것도 있지만 결국은 왕과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 골몰하다보니 대원군의 정책을 죄다 뒤집는 것이 목적이 되고 만다. 나라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왕실이 지탱해나갈 힘을 외세에서 구하려다보니 결국 수시로 청과 일본, 러시아라는 줄을 바꿔 타는 모험을 거듭하게 된다. 줄을 바꿔 탈 때마다 힘은 더 소진되고 그를 제거하려는 상대는 늘어났다.

그런 선택에 동조하지 않는 민심은 다 외면하고 소수의 자기 사람들만 주변에 포진시킴으로써 권력이 그들에게 쏠리도록 길을 열어줌으로써 새로운 세도정치의 판을 까는 역사적 후퇴를 초래한다. 그렇게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한 결과 조선은 나날이 열강에 물어뜯기다 급기야는 그 열강들 간의 묵계로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 단계로 접어든다.

적어도 대원군은 자강하지 못하면 왕실도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과 백성들의 힘을 인식하기는 했다. 비록 자강에 실패하고 백성의 힘은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대상에 그쳤을망정.

그러나 민비의 선택을 보면 그에게 백성이 가진 힘은 신문물로 밀고 들어오는 열강의 힘에 비하면 한없이 하찮아 보였던 것을 알게 한다. 동학교도들이나 훗날 여기저기서 봉기한 의병들에 대한 민비의 시각은 정적인 대원군과 같은 부류로 파악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적들로부터 왕실과 자신을 지킬 힘은 최소한의 측근과 외세였다는 점에서 매우 불행한 역사의 함정에 스스로 몸을 던진 꼴이 됐다.

특히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친정이라는 뒷배조차 없었던 민비는 그 몰락한 친정붙이들을 이리저리 끌어들여 주변을 채웠고 그들에게 권력을 독점시켰다. 권력의 독점은 당연히 탐욕과 부패로 이어진다.

이런 폐단은 민심의 이반을 부르고 국내적으로는 점점 더 고립되는 길로 나아간다. 민씨 일족 중에는 대한제국 멸망에 비통해하며 자진한 민영환 같은 충신도 나왔지만 대개는 부패의 상징이 된 인물들로 민심을 잃었고 스스로의 힘도 잃었다.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더 지혜로운 선택을 했을까. 그런 기대를 할 근거는 없다. 한국을 이미 상당부분 침탈한 상태였던 일본 입장에서 굳이 민비를 시해한 것은 러시아로 줄을 바꿔 타는 민비가 성가셨던 것일 뿐 그의 힘이 두려워서였다고 볼 여지는 없다.

그나마 민비는 어떻게든 왕실은 지키고 싶어 발버둥 쳤지만 고종은 민비가 시해 당하자마자 황급히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선택을 한다. 기센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 민씨 사이에서 스스로는 선택다운 선택을 하지 못한 고종의 시대는 한 왕조의 몰락을 넘어 나라 자체가 외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비극으로 점철됐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에 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장기간의 세도정치와 그로 인해 만연한 부정부패로 허약했던 조선 후기와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잠시잠깐 긴장을 늦추고 몇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라들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나타난다.

지금 국제적 위상이 몇 단계 떨어지는 일 쯤 별게 아니라고 자만하는 순간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절실한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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