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훈민정음을 다시 생각하다
[홍승희 칼럼] 훈민정음을 다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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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다가올 한글날을 앞두고 요즘 유튜브에서는 몇몇 소위 말하는 국뽕 채널들이 AI시대에 한글이 가장 적합한 문자라는 주장을 앞 다투어 싣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여러 채널을 훑다보니 AI의 학습 속도에서 한글이 유리하다는 주장과 한글 자판이 혁신적인 입력속도를 갖는다는 주장까지 어지러워 뭐가 진실인지 잘 파악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글을 비롯해 새로운 AI개발을 하는 기업들이 한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듯하다. 이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한글이 가진 언어학적 구조의 합리성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한국도 다방면의 AI 연구과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언어학자들, 특히 한글학자들이 이런 흐름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를 알리는 소식은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듣지 못했다. 문과와 이과의 벽이 유독 높은 한국적 현상인가 싶어 꽤 아쉽다.

해외의 언어학자들 중에는 한글이 표현할 수 있는 발음의 숫자가 다른 어느 문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특히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보다 글로벌화가 진행될 미래의 국제적 소통수단으로서 한글이 가진 가능성으로서 중요한 요소다.

이미 세계 속에서 문자가 없는 언어들을 표기하기에 한글이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소멸되어가는 소수 종족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 적용 실험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좀 더 주도적으로 이 일에 대한 지원을 해나가야 하지만 지속적인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인도네시아 내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흐지부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회용 이벤트로 언론을 통해 떠들썩하게 소개된 뒤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며 정부 지원도 끊긴 모양이다.

물론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에 대한 우리 정부만의 지속적인 관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유엔에서 문자 없는 소수민족 언어가 사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글을 그 대안으로 채택한 것에 잠시 들떴던 한국 정부로서는 경제적 정치적 실익이 없는 문화사업에 관심이 사라진 것일 테지만 이는 한국문화가 가진 힘에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상당히 의미있는 사업으로 좀 더 관심을 기울여도 좋을 듯하다. 솔직히 경제적 부담이 그리 큰 사업도 아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 가운데서도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제법 있다. 그들은 더 많은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국내 한글학자들조차 무시하는 훈민정음 28자의 복원을 제안하기도 한다. 애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런 해외학자들의 제안은 오히려 고맙다.

이 지점에서 왜 우리는 훈민정음 28자에서 4자를 탈락시켰을 지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한 특별한 기록을 본 적은 없지만 주시경선생이 훈민정음을 ‘한글’로 명명하고 기본자를 24자로 줄인 1910년대가 되면 탈락한 4자가 사실상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만 있다.

언어는 시대의 변천을 따라 변화하는 것이니 그런 주장들에 대해 왈가왈부할 식견은 필자에겐 없다. 그러나 아래아(ㆍ)의 경우 꽤 늦은 시기까지 사용된 흔적을 고서 등을 통해 본 기억이 있어서 사용되지 않아 탈락시켰다는 주장에는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후 일제치하를 겪으며 사용되던 여러 발음들이 일본어에 오염되며 사라진 것이라면 이해가 쉽다. 이는 물론 주시경선생의 생몰연대와 비교해 잘 맞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또 조선어학회에서 전국적으로 우리말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공은 인정하지만 당시의 제약된 여건 속에서 많은 어휘들을 잃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집안 어른들이 지금 우리는 따라하기도 힘든 묘한 발음들을 사용하기도 했고 또 고저장단이 분명 살아 있었다. 그러다보니 불과 50년 전 쯤의 단어와 발음을 되살리기에도 사라진 4자가 아쉽다.

지금으로서는 그 4자의 발음이 어떤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순경음이라거나 하는 표기로 봐서 지금 우리말에는 없지만 외국어에는 있는 발음들이 표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외국 학자들 사이에 있는 듯하다. 당초 한글 창제를 위해 주변국뿐만 아니라 지금의 산스크리트어, 투르키에어까지도 수집, 참고했다고도 하고 또 세종도 어느 나라 말이라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니 충분히 일리가 있다.

지금 한글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말 연구 전반적으로 매우 협소한 표준어 중심 맞춤법으로 상당히 많은 우리말이 유실돼가고 있다.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으면 사투리로 간주되며 가치가 폄훼되지만 실은 그 말들이 잃어버린 고유어의 한조각일 수도 있다는 의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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