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최측근 이학수·최지성, 비자금·뇌물 책임지고 물러나
재계, 미전실 해체 이후 삼성전자 부진 원인 정 부회장 지목
AI 반도체 투자 적기 놓치고 노사갈등 촉발···'TF 책임론' 확대
'삼성전자의 위기'라는 키워드의 뉴스가 연일 경제·산업면을 도배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이토록 위태롭게 보였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론의 걱정이 큰 상황이다. SNS에서도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삼성전자 망하는 거 아니냐"라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 확실히 지금의 삼성전자는 이전에 느꼈던 '세계 초일류 기업'의 위압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반도체 사업 실적은 SK하이닉스에 추월당했고 스마트폰과 가전에서도 해외 기업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데 창립 55주년을 앞둔 삼성전자에게, 위기가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삼성전자는 그동안 숱한 위기를 겪으며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DNA가 내재돼있다. 본 연재기사는 삼성전자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쇠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본다. /편집자 주
[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삼성그룹에는 예전부터 오너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최측근이 있었다. 이들은 예전부터 미래전략실장, 전략기획실장, 비서실장 등의 직함으로 불려왔다. 삼성그룹에 위기가 닥칠 때는 대부분 오너가 책임을 지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오너를 보좌하던 최측근도 책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최근 삼성전자의 위기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부회장)의 책임을 묻고 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지난 5월 쟁의활동에서 정현호 부회장에게 직접 교섭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정현호 부회장을 향해 성토하는 글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삼성전자' 직장명을 표기한 이용자다. 그렇다면 그동안 삼성에 위기가 생길 때마다 이른바 '실세'로 불리는 최측근들은 어떤 책임을 져왔을까?
이학수 전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가장 오래 곁에서 보좌한 인물로 그만큼 영향력이 막강했다. 1985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재무팀 이사를 시작으로 회장 비서실장과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 그룹 내 핵심 수뇌부를 잇달아 책임져왔다.
이학수 부회장은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최측근인 김인주 전략기획실 차장(사장)과 함께 배임과 조세포탈 등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삼성의 컨트롤타워를 없애버린 중요한 사건이 됐고 이수빈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김인주 사장은 삼성카드 고문을 거쳐 삼성선물 사장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했으나 이학수 부회장은 삼성물산 고문으로 발령받아 경영 복귀가 무산됐다. 다만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삼성SDS 이사로 재직할 당시 헐값에 넘겨받은 신주인수권부사채로 수천억원대 상장 차익을 챙겼다.
삼성의 역대 비서실장이나 전략기획실장이 경영·재무 전문가였다면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이례적으로 사업부서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최 부회장은 삼성전자 DMC부문장(現 DX부문)을 거쳐 삼성전자 대표이사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후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미래전략실장을 맡았다.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던 시절부터 독기와 노력이 남다르다고 알려진 최지성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측근으로 머물면서 이 회장의 와병 이후에는 이재용 당시 부회장을 보좌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를 통한 불법 경영승계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뇌물공여 등에 개입하면서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에 사법리스크를 몰고 온 장본인이 됐다.
최지성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사장)과 함께 뇌물공여 등 혐의로 2021년 1월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2022년 가석방돼 출소했다. 이재용 회장은 같은 해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으나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은 사면받지 못했다.
정현호 부회장은 삼성전자에서 경영·인사 분야를 맡은 재무 전문가다. 2017년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난 후 삼성은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TF 체제로 전환한다. 이에 따라 사업지원TF장을 맡은 정현호 부회장은 그룹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며 '실세'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정현호 부회장 체제 이후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초격자 동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한 이후 대형 M&A가 나오지 않는 시점도 미래전략실에 해체한 이후다. 그리고 고대역폭메모리(HBM) 투자 적기를 놓친 것도 TF의 판단 착오였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올해 삼성전자 노사협의회에서 합의한 임금인상안도 "서초에서 반려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사실상 삼성전자 창사 이래 첫 파업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정현호 부회장을 지목한 셈이다.
정현호 부회장은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만큼 섣불리 사퇴를 요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현재 실적 부진에 노사갈등까지 겪으면서 사실상 성장동력을 상실한 만큼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컨트롤타워를 부활시켜 투자 판단에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올해 초 "작은 돛단배에는 컨트롤타워가 필요없지만 삼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항공모함"이라며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효율성과 통일성 측면에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평소보다 이른 11월말에 조직개편과 사장단·임원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사업은 올해 5월 전영현 부회장을 DS부문장으로 임명하는 원포인트 인사를 단행한 만큼 전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전 부회장과 정 부회장은 모두 1960년생 동갑이며 2021년 말 부회장으로 승진한 바 있다.
삼성전자의 현재 위기가 재무적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업부서의 조직개편과 쇄신뿐 아니라 재무부서의 쇄신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