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공인호기자] 국내 은행권에 뿌리깊은 고질병 가운데 하나 '정치인사'.
국내 최대 금융사 가운데 하나인 KB금융지주가 이같은 은행권 인사관행에 대한 정면 돌파 의지를 내비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신임 임영록 회장이 안팎의 예상을 뒤엎고 핵심 자회사인 KB국민은행 수장 자리에 KDI 교수 출신인 이건호 부행장을 전격 발탁했다. 임 회장은 그간 수차례 자회사 CEO 선임 과정에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능력'만 보겠다는 의중을 비쳐왔다.
새롭게 선임된 이건호 내정자 역시 임 회장의 이같은 의중에 화답하는 모양새다. 외부출신이라는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출신에 따른 인사 안배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사실 임 회장과 이 내정자는 KB금융 및 KB국민은행에서 2~3년 가량 재직했지만 정통 뱅커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노조는 외부출신이라 주장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들 CEO의 발언은 의례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겠지만 그간 은행권의 인사관행을 되짚어보면 파격적이다.
국내 은행권의 경우 내부든 외부 출신이든 새로운 CEO가 선임되면 늘상 '화합형 인사'가 화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럴듯 한 말로 포장돼 있지만, 이는 '우리측 출신도 임원으로 발탁해달라'는 속내를 담고 있다. 은행들이 지닌 태생적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KB금융지주 최대 자회사인 KB국민은행의 경우 과거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이 합쳐졌고, 신한금융지주 자회사인 신한은행의 경우 과거 조흥은행이 합쳐져 지금의 입지를 구축했다. 또 민영화를 앞두고 있는 우리금융 지주 자회사인 우리은행 역시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쳐져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하나금융지주의 태생은 이 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과거 보람, 충청, 서울은행에 이어 최근에는 외환은행까지 인수했다. 이른바 '멜팅팟(Melting Pot) 뱅크'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태생이 이렇다보니 표면적으로 물리적 통합은 완성단계에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출신에 따른 알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은행의 경우 현재까지 '한지붕 두가족' 형태의 노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혹시 모를 인사차별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는 목적에서다.
때문에 새로운 CEO가 선임되면 응당 출근저지 운동부터 나서는 노조의 집회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슈가 된 지 오래다. 구조조정 최소화, 출신에 따른 인사 안배, 직원들의 복리후생 등에 대한 약속을 받을 때까지 집회는 계속된다.
물론 노조 측 역시 할 말은 있다. 은행들이 워낙 '외풍'(관치금융)에 시달리다 보니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은행들의 경쟁력도 크게 후퇴했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노조측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출신에 따른 인사 안배가 합리적인가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장기간 정부가 대주주였던 우리은행의 경우 새로운 CEO가 선임될 때마다 출신에 따른 인사 안배를 강조해 온 탓에 유독 심각한 인사청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신한금융지주 역시 CEO간 권력다툼으로 '신한사태'라는 초유의 내분을 겪기도 했다. 이는, 고스란히 국내은행의 이미지 훼손은 물론 경쟁력 저하로 이어졌다.
사실 '정치인사'는 은행권 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병으로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새로운 인물이 하마평에 오르면 언론들이 앞다퉈 뒷조사(?) 하기에 바쁜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심지어 특정 모임이나 교회 이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은행권 역시 CEO가 어느지역 출신인지 어느 고교, 대학 출신인지에 따라 조직원들의 희비는 크게 갈린다. 당장 임기종료를 앞둔 임원들도 CEO가 누구냐에 따라 생명줄이 연장되기도 하고 '파리 목숨'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칫 CEO가 외부에서 오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 진다.
물론 KB금융지주의 인사실험에 어느정도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는 현재로선 판단하기 이르다. 또 안팎의 압력과 반발로 중도에 좌초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관치 논란에 휩싸인 임 회장과 이 행장 내정자의 벼랑 끝 전술 쯤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은행권에 만연해 있는 '정치금융'만큼은 뿌리뽑아야 한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KB금융의 과감한 인사실험은 일단 높히 평가할만 하다. 인사는 만사이고, 금융업의 핵심은 사람(인재)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번 KB금융의 인사실험이 은행권의 인사 병폐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국내 은행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 있는 첫 시금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