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금융홀대'가 차라리 낫다
[기자수첩] '금융홀대'가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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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김현경 기자] 문재인 정부에서 금융업권의 가장 큰 불만은 '홀대한다'는 것이었다. 금융을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거나 다른 산업을 키우는 수단으로만 여겼고, 자체 경쟁력을 높이거나 혁신을 꾀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금융홀대론'은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이제는 좀 다르지 않겠냐"는 희망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해 5월 윤 정부 출범 직후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대 금융지주 회장단과 만나 금융규제를 대폭 개선하는 한편, 민간 금융회사의 경영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겠단 약속을 할 때까지만 해도 업계의 기대감은 컸다.

당시 추 부총리는 "과거에는 금융이 규제의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금융의 산업적 역할이 지나치게 위축된 측면이 있었다"며 "이제는 금융산업이 디지털 전환, 리스크 관리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을 통해 규제차익을 넘어 지속가능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다수의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윤 정부 출범 후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은행은 '공공의 적'이 됐다. 정부의 '나쁜 은행' 프레임 씌우기가 만든 결과다. 경영 자율성을 보장하고 신산업을 위해 낡은 규제를 개선하겠다던 약속은 사라진지 오래다. 규제 개선은 커녕 정치권의 횡재세 논란으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정부의 '나쁜 은행 만들기'는 올해 초부터 본격화됐다. 금리 상승기를 맞아 큰 수익을 올린 은행권을 향해 '공공재'로서 국민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그 시작이었다. 예금자들의 돈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어, 정부 허가를 바탕으로 감독당국의 관리와 규제를 받는 금융업의 특성상 '과점 형태'는 불가피함에도 윤 대통령은 은행 과점을 깰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금융당국 수장들도 대통령 뜻에 부랴부랴 동참했다. 금융지주, 은행 등 금융회사 수장들과 연이어 만남을 갖고 상생금융안 마련을 요구했다. 금융위원회에선 지난 2월 김소영 부위원장 주재로 은행 과점 깨기를 위한 '은행권 경영·영업관행·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가 출범하기도 했다. 금융회사들도 앞다퉈 대출금리를 일괄 인하하는 내용의 상생안을 발표했다.

잠잠해지는 듯 했던 '은행 때리기'는 최근 재점화되고 있다. 지난달 윤 대통령이 은행권을 향해 다시 한번 '종노릇', '갑질' 등의 비판을 쏟아내면서다. 이어 지난 20일 열린 금융위원장과 금융지주 회장단 간 간담회에서 김주현 위원장은 횡재세에 버금가는 규모의 상생안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국회에 발의된 횡재세 법안에 따르면 은행들은 연간 2조원에 달하는 기여금을 내야 한다. 금융사들은 연말까지 2조원에 달하는 금리인하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금융권에선 이번 '상생금융 시즌2'가 시즌3·4·5로 이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선례가 생긴 만큼 앞으로 금리가 올라 이자부담이 크다는 여론이 커지면 정부는 언제든지 '상생금융 카드'를 꺼내들 것이다. 금융회사의 경영 자율성이 침해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좀비사업자 부실 누적, 은행 건전성 악화 등의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자 현 정부에서도 금융산업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란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 금융혁신과 신산업 발굴을 위해 낡은 규제를 대폭 개선해주겠단 약속은 공염불이 됐다. 앞서 은행업에 대한 규제 개선사항 등을 폭넓게 검토했던 '은행권 경영·영업관행·제도개선 TF'도 알맹이 없이 종료됐다. 규제개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20일 상생안 논의를 위해 금융지주 회장단과 모인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다시 한번 규제 개선 가능성을 시사했다. 제대로 된 '상생안'을 갖고 오면 규제 개선을 고민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금융권은 이 발언이 '희망고문'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상생안을 가져가도 규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란 걸. 압박수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희망고문도 계속되고 있다. 금융업에 관심이 없었던 전 정부가 차라리 나았다는 업계의 볼멘소리가 이해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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