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업체 '지명'해 현장설명회 여는 건설사들···"해당 상품에 대한 신뢰 때문에"
건설사의 '최저가 입찰제' 선호···수익률 방어 위해 납품사들은 투찰 가격 담합
과징금은 부당매출의 최대 10%뿐···"담합 행위, 주택 분양가에 영향 미쳤을 것"
[서울파이낸스 박소다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재 관련 담합 행위를 뿌리뽑겠다며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하면서 건설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기업들도 자정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물밑에서 이뤄지는 담합 특성상 근절이 쉽지 않아 고민이 커지는 모습이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공정위는 한 대형 건설사가 발주한 방음방진재 등의 건설자재를 5년 넘게 담합해온 20개의 업체들에게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로 과징금 12억1400만원을 부과했다.
이들은 지난 2016년 2월부터 2022년 4월까지 대우건설이 발주한 방음방진재 등 구매입찰 77건과 관련해 사전에 낙찰 예정자, 들러리사 및 투찰가격을 담합했다. 다수 입찰에 대해 낙철 순번을 사전 합의했고, 낙찰예정자가 들러리사에 휴대폰 메시지 등으로 투찰 가격 등을 통보하기도 했다. 취재 결과 이렇게 담합으로 올린 매출은 27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보다 앞서 공정위는 24개 건설사가 발주한 특판(빌트인) 가구 입찰에서 현대리바트와 한샘 등 31개 가구사가 지난 10년간 730여차례 담합을 벌인 정황을 찾아낸 바 있다. 이들 역시 사전에 낙찰 예정자를 합의하고 투찰가격을 공유해 약 1조9457억원 규모의 담합을 벌였다.
위 가구사들은 영업 담당자를 '건설사별'로 지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10여 년간 담합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공정위는 보았다. 각사 담당자들은 단체 메신저방에서 입찰 상황을 공유하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 돕고 신뢰가 쌓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대로 천년만년 꼭꼭~" 등의 말을 하며 담합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건설사들이 자재를 입찰하는 방식은 큰 틀에서 '일반경쟁' 또는 '지명경쟁'으로 나뉜다. 지명경쟁은 발주 건설사가 입찰에 참여할 협력사를 사전에 선정하고 이들에게만 입찰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취재 결과 대부분 대형 건설사들은 여전히 특정 업체들을 '지명'해 현장설명회를 열고, 이들에게만 입찰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또 입찰액이 자체 책정한 금액보다 높은 경우 재입찰을 실시하는 등 '최저가 입찰제'를 고수했다. 원가율을 줄여야 하는 건설사 입장에선 최저가 입찰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이에 납품사에선 담합이 없으면 수익률 방어가 쉽지 않아 이들의 '니즈'는 맞아떨어진다.
한 사례로 지난 5월 한 업체가 중국산 유리를 한국산 유리로 속여 대형 건설사 브랜드 주택에 납품·시공한 사례도 지명과 최저가 입찰 방식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10대 건설사 중 이번 가구사들의 조직적 담합으로부터 벗어난 기업은 삼성물산, 현대건설, 포스코이앤씨뿐이었다. 이들은 최저가 입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공급 단가를 자신들이 먼저 정한 후 판매해 줄 기업을 찾는 구조라고 했다.
회사들은 위 같은 담합 행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지만 물밑에서 이뤄지는 특성상 담합을 근절할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실정이다. 대기업이 부당지원 및 사익편취를 행위를 할 경우 거래·위반 금액의 과징금 상한은 10%다. 즉, 1조원의 부당매출을 올린 경우 최대 벌금은 1000억원밖에 되지 않으며 실제로는 더 적다. 이번 가구사 담합도 추정 부당매출이 2조원 규모지만 부과 과징금은 931억원이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지명 입찰의 경우 꾸준히 공급받았던 업체와 해당 상품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진행하는 방식"이라며 "해당 업체들이 서로 담합했다는 정황을 사전에 잡아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전에 담합에 가담한 업체라도 주택 조합 측에서 해당 브랜드를 선호하면 입찰에 배제할 수 없는 사정도 있다"고 털어놨다.
문제는 이러한 담합 행위가 건설사들의 품목 구매 비용에 영향을 주고, 주택 분양대금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가구사들은 이번 담합으로 원가율 5% 수준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84㎡를 기준으로 가구당 분양가 25만원을 더 부담했고, 아파트 단지 당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 상당의 내지 않아도 될 돈이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정섭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 부장검사도 이번 사건에 대해 "집값이 비싼 만큼 그 영향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담합이 10년간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분양가에 조금씩이라도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아파트 고분양가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이번 담합 사건으로 인해 분양가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은 더 커질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공정위 심결로 인해 추가적인 민사 소송 등 법정 싸움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앞으로도 국민의 주거생활 등 의식주와 밀접히 관련된 중간재 시장에서의 경쟁을 저해하는 담합 행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적발 시 법에 따라 엄정하게 제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