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엔비디아 등에 세계 최초 샘플 공급

[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초기 대응 실패를 인정하고 HBM4(6세대 HBM)와 커스텀 HBM 등 차세대 제품에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이 같은 언급이 있었던 같은 날 SK하이닉스가 고객사에 HBM4 12단 샘플을 공급하면서 차세대 HBM 주도권 경쟁도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지난 19일 제56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근 삼성전자의 주가 부진에 대해 DS부문의 책임을 언급하며 "HBM4와 커스텀 HBM 등 신시장에서는 작년 과오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하반기 양산 목표로 차질없이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언급은 삼성전자가 초기 AI 반도체 시장 대응에 실패하며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주고 주가 부진으로 이어진데 따른 대책으로 나온 발언이다.
이 밖에 엔비디아에 HBM3E(5세대 HBM)를 공급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현재는 고객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빠른 2분기, 늦으면 하반기부터는 HBM3E 12단 제품이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HBM 시장에서 반등을 꾀하는 시기를 HBM4 시점으로 내다봤다. 이를 위해 지난해 삼성전자는 HBM4 개발 인력 300여명을 편성하고 수율 향상을 위한 TF팀도 100여명 투입했다. 경계현 전 삼성전자 DS부문장은 지난해 "AI 초기 시장에서는 우리가 승리하지 못했다. 2라운드는 우리가 승리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역량을 잘 집결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HBM을 구매하려는 고객사는 SK하이닉스의 HBM4를 먼저 받아보게 됐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 주총이 열린 19일에 보도자료를 통해 HBM4 12단 샘플을 세계 최초로 주요 고객사에 공급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이끌어온 기술 경쟁력과 생산 경험을 바탕으로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HBM4 12단 샘플을 출하해 고객사들과 인증 절차를 시작한다"며 "양산 준비 또한 하반기 내로 마무리해, 차세대 AI 메모리 시장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겠다"고 전했다.
SK하이닉스가 공급한 샘플은 초당 2TB(테라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대역폭을 구현했다. 이는 FHD급 영화 400편 이상 분량의 데이터를 1초 만에 처리하는 수준으로, HBM3E 대비 60% 이상 빨라졌다.
또 HBM3E를 통해 경쟁력이 입증된 어드밴스드 MR-MUF 공정을 적용해 HBM 12단 기준 최고 용량인 36GB를 구현했다. 이 공정을 통해 칩의 휨 현상을 제어하고 방열 성능도 높여 제품의 안정성을 극대화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HBM 점유율 2위인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와 점유율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엔비디아에 HBM3E 12단을 먼저 공급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당초 지난해 2분기 삼성전자의 HBM3E 12단이 엔비디아의 품질테스트를 통과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으나 점점 늦어지는 상황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역시 최근 'GTC 2025'에서 "삼성은 베이스다이에서 ASIC(맞춤형 칩)와 메모리를 결합하는 능력이 있다"며 "삼성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베이스다이(Base Die)는 HBM 맨 아래 탑재되는 핵심 부품을 말한다.
젠슨 황의 이 같은 발언은 원론적인 수준이지만, 지난해 'GTC 2024' 이후 CES 등 주요 무대에서 꾸준히 삼성전자를 언급한 만큼 품질테스트 통과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엔비디아 역시 이번 GTC에서 블랙웰 라인업을 확장한 만큼 HBM 물량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하고 있지만, 추가 공급처를 통한 물량 확보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엔비디아의 이 같은 상황과 전영현 부회장의 발언을 종합하면 2분기 이후부터 HBM3E 12단을 엔비디아에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광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HBM3E 12단 제품으로 근시일내 주요 미국 고객향 테스트에 진입하고 신제품 출시 시기에 맞춰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판매가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3%로 점유율 1위, 삼성전자가 38%로 2위, 마이크론이 5%로 3위를 기록했다. 골드만삭스는 SK하이닉스가 2026년까지 50%대 점유율을 유지하며 업계 1위를 지킬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