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행사 촉구하는 재계···"소송, 경영권 침탈 우려돼"
거부권 행사시 재의결···무력화부터 폐기·수정 재발의 가능성

[서울파이낸스 신민호 기자] "저는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해 제 모든 것을 걸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반대하시는 분들은 무엇을 걸 것인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공개 토론을 제안하며 한 말이다. 여당과 재계가 주주의 소송 남발, 투자 위축 등이 우려된다며 반대하는 것에 대해 이 원장은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을 원점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뜻을 재차 밝힌 것이다.
한경협의 거부로 해당 제안은 무산됐지만,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이 특정 사안에 이토록 강경한 입장을 표한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다. 다만 주주보호와 기업경영권 보장을 내건 양측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거부권 행사 관련 불확실성이 불거지며 한치 앞을 가늠키 어렵단 전망이다.
◇"K-디스카운트 해소"···주주 보호·밸류업 측면서 필수
지난 13일 상법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해당 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또한 전자주주총회 도입 의무화나, 상장회사 합병·분할 시 주주 이익 보호 의무를 부여하는 등 대주주의 권한은 제한하되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상법 개정안 자체는 정부의 밸류업 정책에서 시작됐다. 주식회사 제도의 특성상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분리돼야 하지만, 국내의 경우 지배주주가 이사 선임을 비롯해 기업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특히 기업 지배구조 재편이 지배주주의 지배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일반 주주들의 권익이 침해됐다는 비판이 불거지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작년 밸류업 정책의 일환으로 상법 개정안을 거론했으며,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 역시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원장 역시 "(대통령이) 임명 초기부터 자본시장 선진화와 관련된 방향성을 주신 바가 있고, 여러 차례 그런 노력들을 해 왔다"며 "재의요구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오랜 노력들을 원점으로 돌리는 그러한 방식이 과연 생산적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강조했다.
일반 주주들 역시 거부권 행사에 반발하고 있다. 지난 20일 소액 주주행동 플랫폼 액트는 개인투자자 1만3056명이 참여한 '상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반대 의사 성명서'를 최 권한대행에게 발송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윤태준 액트 소장은 "아직 보완할 부분은 많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상법 개정은 필수적"이라며 "만약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면 한국 시장 발전이 다시 한번 좌초될 것"이라고 전했다.
◇여당·재계 반발 "상법 개정, 기업 경영권 흔드는 행위"
반면 여당과 재계는 개정안이 기업 경영을 과도하게 제약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불이익을 주장하는 주주들의 소송이 남발될 경우, 기업의 설비투자나 인수합병 같은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차질이 발생될 것이란 우려다.
기업 경영권 침해 소지도 크다는 지적이다. 이번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기업은 주주들의 이해관계에 보다 신경써야하며, 글로벌 헤지펀드들의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외부의 경영간섭에 더 취약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한국경제인협회를 비롯한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 8단체는 지난 19일 국회 소통관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한경협은 성명문을 통해 "상법 개정안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를 과도하게 옥죄는 것은 기업의 성장 의지를 꺾고, 산업 기반을 훼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거부권 행사시 재의결···폐기 및 수정 재발의 가능성도
이처럼 상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거부권을 둘러싼 정치권과 재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개정안은 지난 21일 정부로 이송됐다. 이후 대통령은 15일 이내 법안을 심의·공포해야하며, 만약 해당 법률안에 이의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15일 내 재의요구(거부권 행사)를 통해 국회로 환송해야 한다.
또한 최 대행은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내란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 방통위법 등 총 9건의 법안에 재의를 요구했던 만큼,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다.
거부권이 행사될 경우 크게 세가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먼저 국회가 재의결을 통해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방안이다. 이 경우 개정안 유지를 위해선 재적 의원 과반 출석과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다시 의결해야 한다.
두 번째는 거부권 행사 후 야당이 추가 논의를 거쳐 입법을 포기한다는 시나리오다. 여야간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재계 반발이 거센 만큼 개정안의 폐기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세 번째는 거부권 행사 후 야당이 일부 조항을 수정해 재발의하는 일종의 절충안이다. 이 경우 기업이 강하게 반발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같은 조항이 완화되거나,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선회될 수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탄핵심판 선고일이 오는 24일로 예정된 점 역시 변수다. 탄핵심판 선고가 기각될 경우 한 총리가 다시 권한대행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한 총리는 지난달 19일 1차 변론 당시에도 거부권 행사에 대해 여야의 실질적 합의를 강조한 바 있다. 이번 개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한 뒤 여야의 합의를 강조할 경우 재의결 통과는 난항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