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임중도원(任重道遠)'.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맡은 책임과 소임은 무거운데 아직 실천할 길은 멀고 아득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지난해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에서 무노조 경영 폐기를 선언한 지 1년이 훌쩍 지나갔다. 1년여 동안 삼성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 이후 첫 파업을 벌였던 삼성디스플레이 노동조합이 최근 사측과의 임금협상에서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이번 노사 임금협약은 삼성디스플레이 창사 이래 처음이며, 삼성 전자계열사 중에서도 첫 사례다.
앞서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지난 2월부터 노사 임금협상 진행 중 협상이 결렬되자 지난달 21일부터 노조 간부를 중심으로 천막 농성을 벌인 바 있다. 임금 인상과 위험수당 현실화 등을 요구하는 파업이었다. 약 2주간의 진통 끝에 지난 5일 노사는 극적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는 대표이사와 노조의 만남도 이뤄졌다. 지난 5월 25일 최주선 삼성디스플레이 대표가 임금 협상 결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직접 노조 측에 연락해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최 대표는 "노사 협력을 통한 상생 문화를 구축하자"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디스플레이 창사 이래 노조 활동의 첫 성과가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이 부회장의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룹 차원에서 회사가 노조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만큼 노조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릴 수 있었을 것이란 의견이다.
실제 이 부회장의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 이후 현재까지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중공업, 삼성전자판매 등 계열사 3곳에서 노조가 추가로 설립됐으며, 일부 계열사에선 노사 단체협약 등 성과도 있었다.
여기에 회사 내부적으로도 더욱 발전적인 노사 관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는 노동 전문가와 교수, 변호사 등으로 이뤄진 노사관계 자문그룹을 구성했으며 정기적으로 자문회의를 개최하는가 하면 경영진과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 교육 등도 진행하고 있다.
과거 '노조 와해 공작'이라는 오명을 썼던 삼성으로선 변화의 첫발을 뗀 모습이다. 삼성이 창사 이래 50년 넘게 무노조 경영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보면 이 같은 변화는 고무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건전하고 발전적인 노사 관계'라는 지향점까지는 갈 길도 멀다.
노조가 인정되고 노조 활동이 보장됐지만 대부분 계열사의 노조 가입자는 임직원의 10% 안팎 수준으로 전체 근로자를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계열사 노조는 유명무실한 경우도 있다. 또 그룹 내 계열사 간 업무 환경이나 급여, 복지 등 격차도 적지 않은 수준이다. 내부에선 우스갯소리로 '삼성에는 전자, 후자, 서자가 있다'는 말도 떠돈다.
삼성디스플레이 노조 관계자는 "임금 부분만 봐도 과거 회사에서 해주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노조가 먼저 협상을 제안한 것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면서 "임금협약이 첫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 산재 사고 처리나 사원들의 불만 등을 앞장서서 대변해 노조에 힘이 더 실릴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인 지난해 5월 이 부회장은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노사화합과 상생을 도모해 건전한 노사문화가 정착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1년여 만에 그룹 내 전자계열사로서는 처음으로 노조가 보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목소리를 냈고, 노사 간 충돌과 대화 끝에 임금협상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이처럼 노사화합과 상생이라는 그의 선언을 실천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 고되고 지난한 과정이 뒤따를 것이다. 바람직한 노사 관계와 선진경영 문화가 자리를 잡기 위해선 회사도 노조도 서로를 알아가고 대처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때론 거센 갈등과 치열한 기 싸움이 펼쳐질 수 있다.
그의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이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도 상당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책임과 소임이 무거운데 실천할 길은 아직 멀고 아득하더라도, 그럼에도, 노사가 '임중도원'의 마음으로 '상생'과 '공존'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