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별 1조~4조원 현지투자 검토···인프라·ESG 등
[서울파이낸스 김현경 기자] 국내 은행들이 영국에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한다. 글로벌 금융중심지인 영국 런던에서의 네트워크를 강화해 유럽, 중동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거점을 확대하는 한편, 신재생 에너지 투자 등을 통해 글로벌 ESG시장 선도 유럽에서 차세대 먹거리 찾기에 나선다는 복안이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과 산업·IBK기업은행 등 국책은행 수장들은 지난 20일(현지시간)부터 3박4일간 진행되는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순방일정에 경제사절단으로 참여했다.
경제사절단에는 이재근 국민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이승열 하나은행장, 조병규 우리은행장, 이석용 농협은행장,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 김성태 기업은행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영국 순방에서 윤 대통령은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경제, 국방 등 전 분야에서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내용의 '다우닝가 합의(Downing Street Accord)'를 체결했다. 이 중 경제분야에선 한국 기업들이 영국에 210억파운드(약 34조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맞춰 국내 은행들도 각각 수십조원 규모의 영국 현지 투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신한은행은 영국 기업통상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향후 5년간 영국 내 인프라·ESG 분야에 10억파운드(약 1조6000억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투자 방식은 영국 정부 산하 금융투자사와 공동으로 투자하거나 현지 인프라·ESG 분야의 신규 투자처를 발굴하는 방식이 될 예정이다.
신한은행은 이번 10억파운드 투자 외에도 신한투자증권, 신한자산운용, 신한라이프 등 투자 역량을 보유한 그룹 계열사들과 협업해 10억파운드 규모의 추가 투자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신한금융 전체적으로는 총 20억파운드(약 3조2400억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이번 영국 현지투자 확대를 계기로, 런던 중심의 자금시장 허브를 구축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유럽,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자금조달과 운용기능을 강화하고 증권·파생·FX거래 등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나선다.
영국 정부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투자내용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향후 3년간 런던지점 자산을 20억파운드(약 3조2400억원) 이상 늘릴 계획이다. 대출자산 규모를 키우면 현지 투자처를 대폭 확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국민은행은 영국에 진출한 국내 은행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투자은행(IB)·자본시장·상업은행 등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게 강점이다.
하나금융그룹도 오는 2028년까지 런던지점 자산을 25억파운드(약 4조600억원) 이상 확대한 후 프로젝트파이낸싱(PF), 녹색 인프라, IB, 유가증권 등의 분야에 투자를 검토하기로 했다. 외환거래·영업에 대한 강점을 살려 내년 런던에 글로벌자금센터(Global Treasury Centre)도 설립할 예정이다.
농협은행은 현재 런던에 소재한 사무소를 내년 4분기 중 지점으로 전환하고, 향후 7년간 해당 지점의 자산을 7억파운드(약 1조1000억원)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우리은행도 내년에 런던지점의 대출자산을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 확대, 투자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나선다.
한국투자공사(KIC)와 산업은행도 각각 97억파운드(약 15조7000억원), 30억파운드(약 4조8000억원) 규모로 현지 투자에 나선다. 국부펀드인 KIC는 영국 기업통상부와 협업, 오는 2033년까지 재생에너지, 핀테크, 생명과학 등의 분야에 97억파운드를 투자한다. 산업은행도 현지 사무소·법인 등을 통해 향후 5년간 신디케이트론(공동대출), PF, 채권, 무역금융, 파생상품, 벤처캐피탈 분야에 30억파운드를 제공한다.
금융사들은 이번 영국 대규모 투자를 통해 현지 네트워크 접점 확대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들은 이자장사 비판 등 국내 영업이 한계에 봉착해 수익성 악화 위기에 몰린 만큼, 글로벌 수익 확대를 통해 문제를 타개하려고 노력해왔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에서 몇조원씩 이익을 내는 금융사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크기 어려웠던 이유는 '네트워크 산업'이란 금융업 특성 때문"이라며 "해외에서 국내 은행들의 브랜드 파워가 크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사업이 있어도 따내기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현지 금융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